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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9월 가석방으로 나온 필자의 형 익환과 가족들이 어머니 김신묵씨의 임종을 하고 있다. 익환의 맏아들 호근과 영화배우인 셋째 성근씨도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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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11-2
형 익환이 북한에 다녀오던 1989년 어머님은 이미 95살이셨다. 칠순이 넘은 맏아들의 다섯 번째 옥살이를 지켜보면서 속이 타들어가건만 어머니는 “많은 이들이 나라와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가 불에 타죽고, 고문 받아서 죽고 했는데 그 어머니들의 아픈 마음을 누가 다 헤아리겠나? 나는 남편이 세 번, 두 아들이 합해서 일곱 번이나 감옥에 갔지만 그래도 살아서 싸우고 있으니 나처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니?” 하셨다. 이듬해 여름, 어머니는 마당에서 감을 따려고 담장 위에 올라갔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그 후 허리와 가슴의 통증이 심해져 노인 전문 병원을 찾았다. 어머니는 ‘살만큼 산 노인’이라고 푸대접한다며 팔순 이후부터는 웬만해서는 병원에 가기를 꺼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모의 입원이 아들의 석방에 도움이 될까 싶은 마음에 동의를 했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 또 한번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간호를 하던 형수가 잠시 조는 사이 어머니가 침대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친 것이다. 그렇게 총총하던 어머니는 “내가 여기에 왜 와 있지? 용길아, 어서 집에 가자.” 하면서 헛소리를 했다. 깜짝 놀라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정밀진단을 해보니 뇌 손상은 아니고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극도로 쇠약해져 입원해야 한다는 권유에 따라 집 근처 병원으로 옮겼다. 어머니는 허리가 아프다며 내게 뒤에서 안아달라고 했다. 오래 전 할머니가 만주에서 돌아가실 때처럼, 내가 침대 위로 올라가 어머니를 안아드렸지만 통증이 줄어들지 않아 진통제를 맞아야 했다. 며칠 후 어머니의 맥박이 급격히 떨어지자 병원에서는 임종을 준비하라고 했다. 우리는 법무부에 알렸고 형은 전주교도소에서 가석방되었다. “익환아, 네가 왔구나! 너를 보지 못하고 죽는 줄 알았더니 네가 왔구나!” 어머니는 당신의 투쟁으로 형이 완전히 풀려난 것으로 알고 크게 기뻐했다. “이제 통일도 다 되었고, 너도 나왔으니 나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간다. 너희도 슬퍼하지 말고 나를 박수치며 기쁜 마음으로 보내라.” 형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기를 불어 넣었다. 형은 감옥에서 요가를 하며 기를 조절하는 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의사들은 맥박과 혈압이 썩 좋아졌다며 놀라워했다. 그날도 몇 번 기를 넣어드리자 어머니의 상태는 훨씬 호전되었다. 그러자 법무부는 형을 다시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시켰다. 형은 ‘어머니를 보살피게 해준다면 백골이 진토가 되어도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법무부 장관에게 애걸까지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형이 떠나자 어머니는 다시 기력을 잃어가며 어쩌다 눈을 뜰 때마다 큰아들을 찾았다. 사태를 어느 정도 짐작했던지 어머니는 틈틈이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마지막 부탁의 말씀을 하시고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 “주님, 나를 붙들어 주소서. 저는 약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9월 18일 오전 어머니는 혼수상태로 들어갔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인공호흡으로 심장을 유지하는 가운데 형이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형은 다시 한번 어머니에게 기를 불러 넣으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형은 어머니의 귀에 대고 말했다. “어머님의 말씀대로 통일은 다 되었습니다. 남과 북의 민중들이 열화같이 통일을 열망하고 있으니 통일은 다 된 것이죠. 이제 우리가 정성껏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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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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