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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30 18:41 수정 : 2008.10.08 18:14

1991년 12월말께 김대중-이희호씨 부부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필자의 아내 문혜림(맨 오른쪽)씨를 위한 송별회를 열어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김대중도서관 제공

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11-3


1991년 12월 말 아내 문혜림은 한국에 시집온 지 꼭 30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국회의원 임기는 이듬해 7월 총선 때까지였지만, 내가 이미 은퇴하기로 결정을 하고 약속대로 여생을 아내의 고향에서 보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이희호 선생 내외는 떠나는 아내를 위해 특별한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두 분은 처음부터 아내에게 큰 호감을 갖고 있었다. 김 선생은 아내가 한국 사람처럼 소박하게 사는 모습에 늘 경의를 표했다. 그러면서 서양 여성을 이토록 한국에 잘 정착하도록 만든 비결이 무엇이냐고 내게 묻기도 했다. 나는 “사랑이죠”라고 대답했다.

사실 아내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도 많은 일을 했다. 내가 감옥에 가기 전부터 아내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인권 운동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던 그는 3·1 명동성당 사건 때 구속자 부인들과 함께 앞장서서 시위를 했고, 미군부대 우편을 통해 전세계로 한국의 민주화 투쟁과 탄압 소식을 알리는 ‘비밀 전령’으로도 활약했다. 이희호씨는 같이 데모를 할 때면 아내가 서툰 한국말로 우스갯소리를 잘해서 모두를 웃겼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송별회가 열린 식당에는 민주화 운동 동지들의 부인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모였다. 김 선생은 직접 감사패를 읽었다. “여사께서는 한국 인권운동의 선두에 서서 많은 공을 세우셨습니다. 또한 고통받는 사람들, 특히 불우한 여성들을 위하여 선교의 정신으로 뜨거운 사랑을 베풀어 헌신·봉사하셨습니다. …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시는데 우리 내외는 한없는 석별의 정을 느낍니다.” 아내는 한국에 와서 고생은 했지만 즐거운 시간이었고, 특히 기지촌 여성들과 일을 하면서 오히려 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답사를 했다.

나는 동지들의 설득에 이끌려 정치판으로 들어와 4년간 보람도 있었지만 때때로 벽에 부딪힌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평민당 역시도 다른 한국 정당들처럼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그때만 해도 총재 중심으로 모든 일이 돌아가고 있었기에 당원들의 창의성이 전혀 발휘되기 어려웠다. 이런 것들이 답답하고 안타까워 나는 평민당을 민주적으로 혁신하기 위한 여러 아이디어를 내 보았으나, 당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았다. ‘4년 임기가 끝나자 미련 없이 정계를 떠나는 순진한 정치가’인 나를 김 선생은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후일 김 선생은 어느 자리에서 나를 소개하면서 나의 존재 자체가 그를 정신적으로 도왔다고 말했다. 당이 파산될 위기에 들어와서 큰 힘이 되었으며, 나의 미래지향적인 사고로 그의 생각을 넓혀주었다고 했다. 이따금 그는 내게 즉석 연설을 시켜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 그는 그때마다 내가 적절한 말을 해주어 자신들과 당원들에게 자극이 되었다고 말했다.

문동환 목사
아내와 나는 뉴욕 시내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뉴저지의 작은 마을 블룸필드에 정착했다. 우리 둘이 살기에 외롭지 않은 작은 집을 하나 장만해 은퇴생활을 시작했다. 늘그막에는 간소하게 살고 싶다고 늘 학생들에게 말해 왔듯이, 정원을 가꾸고 폐병 요양소에 있을 때 배웠던 수채화를 그리고 도자기도 만들 생각이었다. 또 예수처럼 나무를 만지는 목수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나무를 직접 사다가 책상과 책꽂이, 침대와 옷장을 만들기도 했다. 처음 한동안은 이런 재미에 빠져서 지냈다. 또 그동안 바빠서 정리하지 못했던 민중신학의 교육적인 과제를 다시 연구해 <생명 공동체와 기화교육>란 책을 펴냈다.

이듬해 하드퍼드 신학대학원에서 나와 아내가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공을 인정해 나란히 특별 공로상을 주었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고 평생의 반려자도 만난 곳이었기에 그 감회는 남달랐다. 하드퍼드에서 경험했던 민주적인 학교 생활에 큰 영향을 받아 한신대에서도 이를 실천할 수 있었음을 새삼 떠올렸다. 우리는 내 박사 논문 지도교수 가운데 한 분인 맥아더 박사의 집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그는 신약학 교수로 내가 폐병 수술을 했을 때 헌혈운동을 주동한 분이었다. 덕분에 다시 시작한 미국 생활은 순조롭게 안정이 돼 갔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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