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01 18:26
수정 : 2008.10.08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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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첫번째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국외 공동행사’ 참석차 평양을 방문한 필자가 북쪽 준비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남쪽 준비위원장인 백낙청씨도 함께했다.(오른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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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11-4
“문 목사님, 이 일은 꼭 맡아 주셔야 합니다.” 2005년 초 뉴욕에서 한국민주화 운동을 펴온 이행우 선생이 전화를 해왔다. 6·15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행사 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있는데 나더러 미주위원회 위원장을 맡아달라는 간청이었다. 나는 주저했다. 내 나이 이미 팔순을 넘어 ‘노욕을 부리면 욕만 먹는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나는 통일운동에는 섣불리 참가하지 않고 있었다. 특히나 미국에서는 북과 가까워 보이면 활동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었다. 또 익환 형이 앞장서서 큰 몫을 했는데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민간 차원의 기구여서 일년에 두 번씩 한국과 북한을 다녀오는 경비를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도 은퇴한 처지에는 부담스러웠다.
새삼, 5년 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마주 잡은 손을 함께 올리며 6·15 선언을 발표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뉴저지의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평민당 시절 김 총재와 늘 이야기하던 일이 현실이 된 순간을 지켜보면서 나는 춤을 출 듯이 기뻤다. 그 순간 형이 함께 있었더라면 함께 덩실덩실 껴안고 춤을 추었을 텐데…, 꿈속에서도 통일을 고대하던 부모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사실 6·15 공동선언은 굉장한 사건이었다. 서로 총을 들고 싸우던 적이 평화에 합의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빨갱이’라고 매도당하던 김대중 선생이 김정일 위원장과 악수를 했는데도 돌을 맞은 게 아니라 환호를 받았다. 우리 민족의 각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결국 미국 위원장을 맡기로 결심했다. “통일을 위해 마지막으로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2005년 미주 대표로서 재일 한국민주통일연합 곽동의 상임고문과 함께 공동 해외위원장을 맡은 이후 해마다 6·15와 8·15에 귀국해 남북 공동 행사를 치르는 일을 돕고 있다. 마침 남쪽 위원장은 백낙청 교수가 맡아 반가웠다. 1975년 그가 서울대에서 해직됐을 때 우리는 해직교수협의회에서 만났다. 회장과 부회장을 맡았으나 내가 곧바로 투옥되는 바람에 함께 활동은 거의 못했다. 그 후로 30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도 우리는 뜻이 잘 통했다.
첫번째 6·15 공동행사를 위해 평양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 땅을 밟는 감회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행장에는 안경호 위원장을 비롯한 북쪽 대표들이 나와서 영접했다. 안 위원장은 내 손을 꼭 쥐면서 형이 북에 왔을 때도 자기가 안내를 했다고 인사를 했다. 3박4일의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폐막식에서 내가 마지막 연설을 했는데, 지금까지의 연설 가운데 가장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의 지도하에 따뜻한 접대를 받았다”고 말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또 마지막 대목에서 “우리가 손을 잡고 6·15 정신을 계승하면서 전진하면 앞으로 우리 앞에 밝은 태양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했을 때에는 행사장이 떠나갈 듯한 환호가 쏟아졌다. 내 연설이 그렇게도 감동적이었나? 잠시 의아했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북에서 ‘태양’은 김일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서 내심 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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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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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밖에서 6·15 정신을 계승하는 운동을 펼치려니 난관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이 운동이 통일 운동에 기여하고 미국 정부에도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많은 재미동포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통일 운동을 해 온 이른바 ‘친북 인사’들은 될 수 있으면 조용히 후원만 해주기를 부탁했다. 우리는 미국 동부 뉴욕·필라델피아·워싱턴·코네티컷에 지부를 만들어 동포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그러나 70년대 이전 이민 온 동포들은 대부분 북한을 여전히 빨갱이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내가 ‘6·15’를 위해 일한다는 것만으로 ‘빨갱이 목사’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한인 매체들은 극히 보수적이어서 고국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생업에 지친 이들을 통일 운동에 참여시키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해외위원회를 급하게 구성하다 보니 일본의 총련계를 비롯한 친북 성향이 강한 단체들이 먼저 참여해 조율이 쉽지 않았다. 애초에는 ‘6·15’를 전지구적인 축제로 만들고자 모였으나, 해외 쪽이 갈리어 오히려 남북 화해를 방해할 우려가 없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신경전으로 서로 대립할 때면 참담한 심정이 들기도 했다. 지난 3년의 경험에 비춰, 나는 ‘6·15 실천운동’은 남과 북이 주도를 하고 재외동포들은 손님으로 참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당장 이명박 정부의 퇴행적 대북정책으로 애써 키워온 6·15 정신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더 걱정이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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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잡습니다
10월2일치 28면 ‘길을 찾아서’ 사진설명 필자(문동환)가 악수를 하고 있는 인물은 ‘6·15 공동선언 실천위’ 안경호 북쪽 위원장이 아니라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입니다. 안 위원장은 필자와 김 위원장 사이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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