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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5월 팔순을 기념해 가족과 함께 금강산 여행을 간 필자(오른쪽) 부부. 1938년 은진중학교 졸업 수학여행 때 가본 뒤 63년 만에 다시 보는 금강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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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 끝
1992년 미국 뉴저지에서 은퇴 생활을 시작했을 때에는 정원을 가꾸고 목수 일을 하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날로 커져만 갔다. 잘 먹고 잘 입고 편히 살지만 심정은 늘 목에 뭔가가 걸린 듯 편치 않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긴 터널을 하염없이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뉴욕 선한목자 교회에서 3년간 설교 목사로 봉사하는 한편 플러싱에 있는 미주 장로교 신학교에서 4년 동안 민중신학·이민신학과 기독교 교육을 가르치기도 하는 등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한인 교회들 대부분은 완전히 산업문화에 병들어 버렸고, 그 교회를 섬기는 목사들도 기진맥진해 있었다. 동포들은 아메리칸 드림에 사로잡혀 자식들을 일류대학에 보내고 돈을 모아 교외에 큰 집을 사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교회가 사회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야 한다는 나의 비판적인 설교를 제도 교회에서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런 제도 교회들의 문제를 극복한 ‘새 교회란 어떤 것인지’ 하는 주제는 은퇴 이후 나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가 됐다.
미국에서 살기 때문에 더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도 사실이다. 다국적 기업들이 주도하는 세계화가 인류에게 어떤 재앙을 초래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게 되었다. 미국만 해도 ‘떠돌이’ 이주민들이 120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매일 수 십만명이 목숨을 걸고 멕시코 국경을 넘어 들어오고 있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지중해를 건너 스페인으로 들어오는 아프리카인들, 위험을 무릅쓰고 캄캄한 밤중에 흑해를 건너 북유럽으로 들어오는 무슬림교도 등 전세계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주민들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다국적 기업들은 가는 곳마다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농토에서 추방하고 있다. 그들은 저임금 노예로, 혹은 성매매 여성으로 팔려가고 있는 것이다.
6·15 관련 행사로 일년에 두어 차례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나는 떠돌이들을 위해 일하는 단체들을 찾아가 보았다. 아내가 시작한 기지촌 여성 선교센터인 ‘두레방’도 이제 한국 여성보다는 필리핀·러시아 등에서 들어온 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일하고 있었다. 김해성 목사가 영등포에서 운영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집’, 최이팔 목사가 헌신하고 있는 ‘서울 외국인노동자센터’, 박찬웅 목사가 여러 나라에서 온 이주민들을 위해 국경 없는 마을을 만드는 안산의 ‘코시안센터’ 등을 방문했다. 김현수 목사의 ‘들꽃 피는 마을’과 김종수 목사 내외가 벌이는 ‘아힘나’ 교육 프로그램도 퍽이나 의미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제도 교회의 틀을 벗어난 운동이었다.
나는 이런 현실에 눈을 뜨면서 ‘민중신학에서 떠돌이신학으로’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다. 내년쯤에는 여러 단체들과 함께 ‘떠돌이 신학 연구소’를 만들 구상도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내 삶 역시 떠돌이의 삶이었다. 일제를 피해 고국을 떠나 만주로 밀려난 떠돌이들의 후예로 태어나 독립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났다. 북간도에서 아브라함처럼 유리 방랑하는 떠돌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김약연 목사를 보며 목사가 되기로 꿈을 꾸었다. 고향인 북간도에서 억지로 떠밀려 나와 서울에서 또다시 떠돌이 생활을 했고, 유학 시절 10년을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다. 그리고 다시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미국 땅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떠돌이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다시 읽어보니 성경의 주인공들도 떠돌이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룩하려는 뜻은 서로 다른 민족이 서로 축복을 하면서 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21세기 우리의 소명은 이 떠돌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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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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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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