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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민정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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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나의 한살매 5
‘꼬마 레닌’ 눈엔 아리송세상 마침내 8·15가 왔다고 발칵 뒤집혔다. 나는 그때 초등학교 6학년 꼬마였지만 사람들을 따라 만세도 부르며 무척 울었다. 떼로 몰려가 일제 경찰서를 때려 부수고 일제순사를 꿇어앉히자 언제 거들먹거렸더냐, 정말 잘못했다, 살려만 달라고 살살 운다. 그렇게도 뻗대든 순사가 울어? 그러는데 갑자기 칼을 빼들고 달아나다가 잡혔다. 사람들의 노여움이 도끼가 되고 쇠스랑이 될 적에 나도 낑기리만치 아, 8·15 그것은 한바탕 벅참이 왕창 터지는 가름이었다고 더듬어진다. 하지만 8·15는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 말씀이 일제만 물리치면 그까짓 돼지기름데이뿐이랴, 네 애빈 통돼지를 메고 올 거라고 했는데 그 아버지가 만세를 부르다가 똥구덩이에 빠졌다는 것이다. 똥구덩이에 빠졌다면 갔다는 게 아닌가. “야 아바이, 어쩌다가 그렇게 됐네?” “야 이 새끼야, 일본 놈들이 남긴 건 모두 똥구덩이야. 그래서 뒤엎으려던 것이지, 내가 빠졌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 똥구덩이를 다 없애려고 하면 한참 걸릴 것이니 돼지기름데이 얻어먹기는 다 틀렸구나.내가 알 수 없는 건 또 있었다. 우리 선생님은 입는 것 노는 것이 꼭 일본사람에다 부러(자청) 더한 것 같았다. 아침마다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에 허리를 덜 굽혀도 때리고 우리말 한마디만 써도 때리고 더구나 나한테는 전투비행기 만드는데 한 푼 안 낸다고 눈을 흘긴다. 그런데 갑자기 낡은 조선말 책을 들고 나와 우리말을 배우자, 우리 역사를 깨우치자고 수선을 떤다. 어린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일제순사도 우리 선생님도 어떻게 저렇게 왔다갔다 할 수가 있을까. 내 라비(고향) 연자방앗집 기둥은 거의가 밤나무였다. 그래서 말벌들이 윙윙 구멍을 뚫고 사는데 거기에 갑자기 ‘알림’이 붙었다. 뭐라고 붙었느냐. 일제가 남긴 똥구덩이를 뒤집자는 게 아니고 ‘살인강도 두목 김구를 타도하자!’ 참말로 김구 할아버지가 사람 죽인 강도였을까? 어린 나는 알 수가 없었다. 8·15를 기리자며 우리 학교에선 좋은 말짓기가 벌어졌다. 나도 이렇게 적어냈다. “네 주의 내 주의 다 버리고 건국을 위하여 한뭉치 되자” 이 말귀가 으뜸으로 뽑혔는데 선생님 말씀이었다. 덮어놓고 하나가 되자는 건 틀렸다는 것이다. 옳음을 알기(중심)로 하나가 되자고 해야지. 나는 매우 헷갈렸다. 올바름을 알기로 모두가 뭉치자는 말이 더 좋아 보이긴 하다. 그렇다면 일제지배 밑에서 선생님은 왜 일본 천황을 알기로 똘똘 뭉치자고 했을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 말귀로 하여 나는 은율 군청 강당에서 ‘건국을 위하여 한뭉치 되자’는 도틈(제목)으로 말을 하게 되었다. 아무려나 언니가 써준 것을 외우는데 어린 것이 잘도 외운다고 손뼉을 쳐주는 바람에 줄기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찌 할꼬, 팽팽 돌다가 얼김에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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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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