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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0.14 18:48 수정 : 2008.10.16 18:52

백기완-나의 한살매 8

“야 아바이, 콩나물에다 꽁치 통조림 까 넣고 끓이는 국 먹어 봤어. 우리 그거 한 술 먹어 보자우.” 그래서 쌀 한 되로 밥을 지으니 밥이 여덟 그릇, 거기다 꽁치 콩나물국 한 솥을 몽땅 득달처럼 먹어치웠다. 한동안 너끈할 거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추워진다. ‘어라, 모처럼 먹었는데 춥다니’ 꿈적여도 미념(소용)이 없었다. 왜괙 게웠다. 아까웠지만 어떡허랴. 와들와들 떨릴 짬도 없었다. 숨이 가빠 한 발자국도 떼질 못하겠다. 겨우 전봇대에 기대 쓰러졌다. 지나던 누군가가 야 이거 ‘엠병’(장티푸스)일 거라 하고 누구는 ‘급성폐렴’일 거라고 한다. 내 보금자리 서울역 마루로 가다가 뜻밖에도 아버지와 다시 마주쳤다.

“이게 어더렇게 된 거가. 괜찮아, 따슨 눌데(방)에서 한숨 자고 나면 거뜬해. 자, 가자우.”

효자동 끝까지 걸으며 기며 갔다. 야트막한 잿집(기와집) 큰들락(대문)을 밀치며 “아주마이, 우리 애 좀 뉘우자구요.” 거의 어거지로 따슨 눌데에 뉘어놓고 아버지는 어딘가로 가신다. 아무리 따슨 눌데에 누웠어도 춥고 숨이 차 견딜 수가 없는데 그 집 아들이 “이 새끼 이거 발진티푸스가 틀림없다”며 질질 끌어다가 한데에 팽개친다.

캄캄한 밤, 눈보라는 쌩쌩. 이때 멀리서 ‘신고산이 우루루 화물차 떠나는 소리~’ 익은 노랫소리가 들리더니 아버지다. 내 꼴을 보자마자 “누가 그랬어.” 딱 그 한마디 끝에 돌멩이로 그 집 들락(문)을 왕창왕창 다 짓모은다. “나와, 이 백땅년 죽이겠다”고 다 부숴 놓고선 가잖다.

한참을 기어 나왔다. 웬 마차가 눈을 맞으며 딸랑대고 있다. (그땐 왜놈들이 놓고 달아난 말로 역마차가 있었다.)

“아저씨, 우리 애가 아파서 그래요. 돈은 없지만 서울역까지만 좀 데려다 주시우.”

“그래요, 사람은 돈보다 목숨이지요.” 그러면서 달리는데 어디선가 라디오 소리가 들린다.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 누구를 싣고 가는 서울거리냐 / 울어라 역마차야 세종로가 여기다 / 삼각산 바라보니 별빛이 반짝’

그 소리를 들으며 서울역 큰마루 찬 바닥에 뉘어 놓고선 아버지는 어딘가로 또 가신다.

“넌 고기만 한 조박 먹으면 나아, 내 곧 올게.”

곧 오신다던 아버지를 기다리길 한 댓새. 한데서 몇 날을 쿨적이던 젊은이 하나가 죽어 나간다. 한 늙은이는 밤새 동태가 되고. 나도 얼마 안 남았지 싶을 때였다.

“여기 백기완이란 소년 어디 있습니까. 백기완이란 소년 모르세요?” 그런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저 새끼가 또다시 나를 소매치기로 몰려는 건 아닌가.’ 하지만 놀랄 일이다. 임정의 큰어른 조소앙 선생이시다. 나를 보시더니 어떻게 이렇게 되었느냐, 가잔다. 김구 할아버지와 너를 중학교엘 보내기로 했으니 가잔다.

백기완
이야기가 좀 되여울지지만 까닭은 이랬다.

우리 아버지와 잘 아는, 기독교청년회 총무를 지낸 현동완 선생이 조소앙 선생한테 우리 어른들 어린이한테 꾸중 좀 듣자고 했단다. “백기완이라는 애가 가슴을 찌르는 말을 잘한다, 그러니 서울운동장 큰모임 때 내세워 보라”고 해서 내가 나섰는데 잘나가다가 그만 줄거리를 잊고 말았다. 그 추운 겨울 속옷도 없는 너덜바지만 입었으니 오죽 얼붙는가. 그래서 왔다 갔다 하다가 내 이야기를 해버린 것이었다.

“여러분, 하나가 되세요. 서로 갈라져 통일독립을 이룩하질 못할 것이면 나는 여러분들을 조정놈(도둑놈)으로 몰겠습니다. 조정놈이 되고 싶으면 갈라서고, 애국자가 되고 싶으면 하나가 되셔야 합니다.”

1946년 12월, 김구 선생과 조소앙 선생도 함께한 서울운동장이었다. 그것이 끈매(인연)가 되어 조 선생이 서울역 세면마루까지 찾아와 “가자.”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면 병원이라도 가자”고 달랠 때다.

그 추운 겨울 어디서 삶아 먹으라고 꽁꽁 얼붙은 홍어 한 마리를 끌고 온 아버지가 “내버려 두세요. 우리 애가 김구 선생이나 선생님한테 가서 배우면 선생님들을 닮게 될지 모릅니다. 내버려 두세요. 저 혼자서 깡패가 되든 혁명가가 되든 제 할 탓으로 살아야지요.”

“그러면 먼저 병원이라도….”

“병원엘 갔다 나오면 어델 갑니까. 또 여깁니다. 고맙지만 놔두세요. 그까짓 ‘급성폐렴’에 숨을 빼앗길 애가 아니라니까요.”

찬 바람이 됫싸지더니 어디선가 들려오던 해방된 역마차란 노랫소리도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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