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8.10.15 18:51 수정 : 2008.10.16 18:52

백기완-나의 한살매 9

샛노란 절망을 어쩔거나

눈깔만 남았다는 이야기를 아는가.

열이 걸리면 셋은 죽는다는 ‘급성폐렴’을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한데서 주사 한 대 못 맞고 쓸루(약가루) 한술 못 먹고 일어나자, 둘레의 빌뱅이들이 마른입을 찧었다.

“저건 밑떼(저력)가 있는 애라고, 죽지만 않으면 아마도 씨름꾼이 될 거야.”

그러나 그것은 개수작이었다. 몸은 다 가고 눈깔만 남았기 때문이다. 손바닥과 얼굴도 노오랗고 갈 데라곤 노리끼리한 ‘난민수용소’뿐이었다. 유리가 없는 들락(문), 삐그덕대는 바닥, 겨우 열 사람이 누울 만한 넓이에 서른이 넘는 사람들이 빼곡히 꼬불치는 곳.

아침에 일어나도 밥이 없었다. 똥뚝은 똥이 덤(산)처럼 뾰족이 얼어 엉덩이를 댈 수가 없고 이 때문에 일어나자마자 짜증이 엇갈렸다. 거기에 홀어머니와 함께 있는 내 동무 살구는 그렇게 마음이 고울 수가 없는데도 나한테는 이따금 밉살스럽게 엥겼다.

이 바닥에 있는 ‘이’는 모두 내 거라고 한다. 아니다, 네 거라고 실랑이를 하다가 붙었는데 죽다 산 내가 택이나 있을까. 실컷 밟히고 난 날 난 아버지를 만나 따졌다.


“야 아바이, 아직도 눌데(방) 한구석 못 얻었네.”

“야 오소리도 쭐이타면(급하면) 남의 집을 밀고 들어가 이 새끼야. 맨 놈의 집인데 왜 밤나닥 집 투정이냐.”

“뭐야, 나 가가서, 북쪽 엄마이한테 도루 가가서.”

“갈 테면 가라우, 이 백땅놈의 새끼야.” “못 갈 줄 아네.”

홧김에 금이 없는데도 38선이라는 곳까지 갔다가 매만 맞았다.

“네 에미 머리엔 벌써 시뻘건 뿔이 났어. 뿔난 에미는 만나 뭘 해 임마.”

“뭐야, 우리 엄마이가 얼마나 예쁜데 뭐 뿔이 났다고, 죽여 버리겠다”고 대들다가 매만 맞고 돌아서며 나는 하늘도 땅도 샛노랗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깜떼(절망)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사람도, 축구도, 들도, 먹거리도 모두 노오랗게 보이는 깜떼. 깨어보니 또 그 ‘난민수용소’다.

그런데 살구 녀석이 빙그레 웃으며 밀어준다. 꽁꽁 얼은 ‘이’ 여남은 마리는 네 것이니 갖고 가 잠만은 딴 데서 자란다. “뭐야, ‘이’라고 하면 어째서 모두 내 것이냐 이 새끼야” 하고 한판 하러 나가며 생각했다. ‘쟈하고 붙어서 내가 지면 나는 죽지도 못한다. 그러니 반드시 이기자’ 하고 배지기로 들었다 엎고선 막 까려는데 누가 툭툭 친다. 가대기(어깨 짐군) 언니다.

“언니, 오늘은 내가 이겼지.” 그랬는데 딴말을 한다.

“싸움은 뺏는 놈, 일테면 있는 놈하고 붙었을 때 이기고 지고가 있는 거야. 가진 것이라곤 ‘이’밖에 없는 것들끼리 붙어봐야 서로 코만 터져.”

백기완
나는 그때까지 가장 따르고 싶은 이가 있다면 그 누구보다도 가대기 언니였다. 어느 날 북쪽으로 가는 기차를 타 볼까 하고 염춘교 다리 밑에 쭈그리고 있는데 웬 덩메가 모두발로 한 막일꾼을 내지른다. 일어나려고 하면 또 차고 거의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들어오는 것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철로 위로 패대기를 치려고 한다.

이때 “언니, 나 잘못했소, 살려만 달라”고 한다. “그래, 살려주면 앞으로도 나한테 언니라고 할 테냐.” “네.” 소리도 사뭇 꾸정(비겁)하게 내뺀다.

나는 너무나 멋있어 “언니, 아까 그 사람 누구야?”

“또깡(김두한)이지, 주먹패 우두머리. 그 새끼가 날더러 북쪽으로 가는 철로를 떼 오라는 거야. 북쪽으론 이제 못 가니까 돈이나 만들자는 거야. 하지만 나는 안 된다고 했지. 떼 낼 것은 38선이지 철로가 아니라고. 그랬더니 날보고 빨갱이라며 까불다 깨진 거지.”

멋쪘다. 그래서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는데 ‘오늘은 내가 이긴 것을 그따위로 뭉개?’ 보기가 싫어 발을 끊었었다. 그런데 그 뒤 언니는 깡패들한테 어디론가 끌려가 돌아오질 않는다는 소리에 울컥, 입때껏 그 언니의 말을 새기며 살고 있다.

“싸움은 뺏는 놈, 있는 놈하고 하는 거야 임마. 가진 것이라곤 ‘이’밖에 없는 놈끼리 붙어봐야 코만 터져 이놈들아.”

그렇게 서울역 어딘가에 새긴돌(시비)이라도 하나 세우고 싶은데 요즈음은 빠른 기차(KTX) 여승무원들이 빼앗긴 자리를 도루 내놓으라면서 싸우고 있다지 ….

또다시 온몸이 스물스물 눈깔만 남는 것 같으다. 통일꾼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길을 찾아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