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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0.22 18:54 수정 : 2008.10.22 18:54

삽화 민정기 화백

백기완-나의 한살매 14

여학생이란 만나고 나면 적어도 한 열 해는 늙는다. 그때 떠돌던 뒷골목 말, 그것을 못 헤아릴 만치 나는 되게 모자랐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만나 보니 열 해가 아니라 한 스무 해쯤 미리 늙는 것 같았다. 나보다 한 두어 살 위일 것 같은 여학생이었다.

“너, 멀쩡하게 돼먹은 애가 어째서 그 못난 깡패 짓을 하니?” 첫마디가 송곳으로 후비는 것 같았다.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너, 내 동생 책가방은 왜 뺏었어. 책가방 뺏는 도둑놈도 있어. 내놔.”

아침엔 그의 아버지가 와서 내 간장을 후벼놓았었다. “어서 내놔 이놈아, 남의 책가방을 뺏었다고 학생이 되는 줄 알아.” 그러면서 귀싸대기를 먹이고 갔었다.

그런데 이 여학생은 훨씬이 아니라 아주 더 못돼 보였다. 그 책가방으로 말을 하면 내가 뺏은 것이 아니다. 밑도 끝도 없이 “왜 째려보느냐”며 먼저 후려쳐 “이 새끼 죽여버리겠다”고 하자 책가방을 놓고 달아났던 것인데 날더러 뺏었다니….

나는 그 책가방을 돌려주려고 그 녀석이 학교 가는 때결(시간)에 남산에 올라 기다리기를 사흘째, 그 녀석이 안 온 것뿐이다. 그런데 엉뚱한 수작들을 한다.

“너, 주먹을 빼드는 애들이 어떤 애들인 줄 알아. 골이 빈 애들만 그러는 거야.”

“나도 내 골 속엔 영어사전의 낱말이 가득 들어 있다구, 그따위 수작 말어.”

“야, 사람의 머릿속엔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 줄 알아. 영어 낱말? 아니야, 한쪽은 살냄(정서)을 키우는 앎이고, 또 한쪽은 마음을 키우는 깨침이야. 너, 릴케 알아? 이게 릴케의 시집이야. 이거 줄 테니 내 동생 책가방 내놔.”


나는 주기가 싫었지만 더는 어쩌는 수가 없어 나무그늘에 두었던 것을 갖다 주었다. 가방을 열어 보다가 “이게 무슨 냄새야, 너 도시락 강도라고 하던데 왜 안 먹었어.”

“이봐, 나는 뺏어는 먹어도 놔두고 간 것은 안 먹어.” “녀석 꼴값하네.” “야 무슨 꼴값을 한다는 거냐.” “도둑놈 꼴값이지.”

나는 릴케 시집을 집어던졌다. 그 길로 글묵집(책방)으로 달렸다. “아저씨, 리~릴케 시집 있어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야 임마, 빌뱅이 새끼가 릴케는 왜 찾어.”

나는 그길로 물가엘 갔다. 홀랑 벗고선 박박 닦은 다음 다시 글묵집엘 가서 리~릴케를 찾았더니 도서관이나 가보란다. 국립도서관(요즈음 롯데여관)엘 갔지만 찾을 줄을 몰라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묻고 저기서 물어 겨우 찾았으나 우리말이 아니라 읽을 수가 없고, 읽어도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었다. 밥 먹는 데를 내려가서 대학생 언니한테 말을 했더니 읽어준다. 나는 한참을 눈을 굴렸다. 아까 그 여학생은 가랑잎 이야기를 했었는데…,

“가랑잎이 파르르 구르면 그저 가을만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그 소리에서 아련한 살냄을 살찌우도록 해야 사람이다. 너처럼 주먹이나 휘두르고 도시락이나 뺏어 먹는 것도 사람이냐, 돼지보다도 못한 짐승이지.”

백기완
그럴 때 나는 언뜻 라비(고향)의 할머니 어머니를 떠올렸었다.

일을 해도 해도 우리 할머니, 우리 어머니는 가랑잎처럼 말랐었다. 하지만 바람이 분다고 파르르 떠는 가랑잎과는 전혀 달랐다. 일을 할수록 빈손에 남는 노여움을 떨었거늘, 릴케라는 사람은 썅이로구(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우리 할머니,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것일까? 아마도 내가 잘 몰라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릴케에 마주한(대한) 글이나 글묵(책)을 찾아 헤매이기 거의 한 해. 그런데 건질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속이 뒤집혔다. 문득 릴케를 알아야 사람이 된다고 하던 그 이름 모를 여학생의 말은 나한테 씌운 굴레였구나. 그렇게 생각되자 나는 도서관 마룻바닥에 누우런 가래침을 뱉어버렸다. 에이 퉤!

이를 본 어느 학생이 내 어깨를 치며 가래침은 왜 뱉느냔다. 릴케 이야기를 했더니 “너 바닷가엘 가봤어. 자갈돌이 그렇게 많지. 그 자갈돌 하나가 바로 릴케야 임마, 그냥 쏠리기만 하는 자갈돌” 그런다. 나는 갑자기 서글퍼졌다.

아, 나에게도 스승이 한 분 계셨으면 자그마치 한 해씩이나 헤매고 다니진 않았을 텐데. 또다시 나의 배우기는 쌔코라졌구나(망하다). 나는 밑도 끝도 없이 엄마이를 불렀다.

“야 엄마이, 나 기완이야. 갑자기 엄마이가 보고 싶어서 그래. 나 이참 울고 있어 엄마이.” 통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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