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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민정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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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나의 한살매 14
여학생이란 만나고 나면 적어도 한 열 해는 늙는다. 그때 떠돌던 뒷골목 말, 그것을 못 헤아릴 만치 나는 되게 모자랐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만나 보니 열 해가 아니라 한 스무 해쯤 미리 늙는 것 같았다. 나보다 한 두어 살 위일 것 같은 여학생이었다. “너, 멀쩡하게 돼먹은 애가 어째서 그 못난 깡패 짓을 하니?” 첫마디가 송곳으로 후비는 것 같았다.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너, 내 동생 책가방은 왜 뺏었어. 책가방 뺏는 도둑놈도 있어. 내놔.” 아침엔 그의 아버지가 와서 내 간장을 후벼놓았었다. “어서 내놔 이놈아, 남의 책가방을 뺏었다고 학생이 되는 줄 알아.” 그러면서 귀싸대기를 먹이고 갔었다. 그런데 이 여학생은 훨씬이 아니라 아주 더 못돼 보였다. 그 책가방으로 말을 하면 내가 뺏은 것이 아니다. 밑도 끝도 없이 “왜 째려보느냐”며 먼저 후려쳐 “이 새끼 죽여버리겠다”고 하자 책가방을 놓고 달아났던 것인데 날더러 뺏었다니…. 나는 그 책가방을 돌려주려고 그 녀석이 학교 가는 때결(시간)에 남산에 올라 기다리기를 사흘째, 그 녀석이 안 온 것뿐이다. 그런데 엉뚱한 수작들을 한다. “너, 주먹을 빼드는 애들이 어떤 애들인 줄 알아. 골이 빈 애들만 그러는 거야.” “나도 내 골 속엔 영어사전의 낱말이 가득 들어 있다구, 그따위 수작 말어.” “야, 사람의 머릿속엔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 줄 알아. 영어 낱말? 아니야, 한쪽은 살냄(정서)을 키우는 앎이고, 또 한쪽은 마음을 키우는 깨침이야. 너, 릴케 알아? 이게 릴케의 시집이야. 이거 줄 테니 내 동생 책가방 내놔.”나는 주기가 싫었지만 더는 어쩌는 수가 없어 나무그늘에 두었던 것을 갖다 주었다. 가방을 열어 보다가 “이게 무슨 냄새야, 너 도시락 강도라고 하던데 왜 안 먹었어.” “이봐, 나는 뺏어는 먹어도 놔두고 간 것은 안 먹어.” “녀석 꼴값하네.” “야 무슨 꼴값을 한다는 거냐.” “도둑놈 꼴값이지.” 나는 릴케 시집을 집어던졌다. 그 길로 글묵집(책방)으로 달렸다. “아저씨, 리~릴케 시집 있어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야 임마, 빌뱅이 새끼가 릴케는 왜 찾어.” 나는 그길로 물가엘 갔다. 홀랑 벗고선 박박 닦은 다음 다시 글묵집엘 가서 리~릴케를 찾았더니 도서관이나 가보란다. 국립도서관(요즈음 롯데여관)엘 갔지만 찾을 줄을 몰라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묻고 저기서 물어 겨우 찾았으나 우리말이 아니라 읽을 수가 없고, 읽어도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었다. 밥 먹는 데를 내려가서 대학생 언니한테 말을 했더니 읽어준다. 나는 한참을 눈을 굴렸다. 아까 그 여학생은 가랑잎 이야기를 했었는데…, “가랑잎이 파르르 구르면 그저 가을만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그 소리에서 아련한 살냄을 살찌우도록 해야 사람이다. 너처럼 주먹이나 휘두르고 도시락이나 뺏어 먹는 것도 사람이냐, 돼지보다도 못한 짐승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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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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