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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민정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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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나의 한살매 16
싸움이 터졌다고 벅적였다. 그때 내 나이 열일곱, 관악산 밑 찍줄(전기)도 없는 승방뜰(사당동)에 살 적이다. 과천으로 넘어가는 자갈길엔 불길을 비키려는 사람들로 빼곡히 차,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떠밀려 흐른다. 아버지, 언니, 애루(동생) 인순이, 나 이렇게 넷도 어딘가로 가긴 가야 했다. 하지만 그 살갖은(따슨) 시골에서 우리만이 저녁을 못 해먹어 배가 고파 떠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봉자네서 돼지나 주는 톨감자 한 말을 꾸어다 냇가에서 벅벅 씻었다. 그을린 솥에 붓고 막소금을 뿌린 다음 보리 짚으로 삶아 먹고 넘어가는 남태령 고개. 꽝! 한강 다리가 깨지는 소리라는 말이 들리자 뛰는 사람이 많았다. 성환쯤 갔을까. “점례야, 아버지, 어머니.” 부대끼는 소리보다 더 큰 소리가 들려왔다. “야 홍렬(아버지)아 이 새끼야, 넌 어째서 피난을 가면서 빈손으로 가냐? 남들은 죄 메고 끌고 가는데.” 아버지의 끈끈한 벗 풍언 아저씨였다. 어쨌든 이때 우리 아버지의 맞대(대답)는 내 한살매의 어림빨(상상력) 그 나래가 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야, 온 땅덩이에 불이 붙었을 땐 목숨만 챙겨 가면 되는 거야. 제 것이나 꽁쳐 가려고 하면 속에서 이는 싸움 땜에 먼저 죽어 인석아.” ‘온 땅덩이에 불이 붙었을 땐 목숨만 챙겨 가면 된다고?’ 나는 그 말을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우리 밥네(식구)를 놓치고 말았다. 얼마쯤 가는데 쌕쌕쌕, 처음 보는 비행기가 날아가자 웬 뜅뜅한 아저씨가 하늘에 대고 소릴 지른다. “미군 아저씨들, 북쪽에 원자탄을 퍼부으려고 가는 거죠. 한방 갖고는 안 됩니다, 북쪽 놈들 씨를 말리라구요.” 얼마 있다가 쌕쌕이가 날아가자 또 그런다. 나는 핏대가 울컥했다. ‘원자탄을 떨어뜨릴 것이면 북쪽에 계시는 우리 엄마이가 죽는데…’ 그래서 말 한마디 한 것뿐이다. “아저씨, 그러질 말아요. 원자탄이 떨어지면 다 죽는 거라구요.” 그래 말했다고 나를 헌병대에 끌고 가 “이 새끼, 이거 빨갱이 새끼니까 해치워 달란다.” 한참을 쭈그리고 있는데 헌병이 묻는다. 왜 잡혀 왔느냐고. 그래서 “북쪽에 원자탄을 떨구자고 해서 집어치우라고 한 것뿐”이라고 했더니 찬찬히 쳐다보다가 “아새끼, 죽이긴 아깝구나. 너 임마, 취미가 뭐야?” “나요, 축구요.” “뭐, 축구가 취미라고? 그래그래 축구 좋아하는 놈은 거짓말은 안 해, 나가” 그런다.한참을 걸어 나와 막 사람들 틈에 낑기려는데 아까 그 아저씨가 “야 임마, 넌 아직 덜 끝났어 임마” 그러는 때박(순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냥 받아버리고 말았다. 벌러덩하는 것을 마저 밟으려다가 그만두고 서둘러 가는데 이참엔 군인들이 그 자리에서 군대를 뽑는다며 차에 타란다. 나 같은 애들도 있고 어른들도 있다. 붕~ 한참을 달리다 빗길에 곤두박히던 생각은 난다. 깨어보니 캄캄한 밤, 나 혼자 논바닥에 곤두박혀 있어 “사람 살리라”고 소릴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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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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