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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0.26 19:05 수정 : 2008.10.26 19:05

삽화 민정기 화백

백기완-나의 한살매 16

싸움이 터졌다고 벅적였다. 그때 내 나이 열일곱, 관악산 밑 찍줄(전기)도 없는 승방뜰(사당동)에 살 적이다. 과천으로 넘어가는 자갈길엔 불길을 비키려는 사람들로 빼곡히 차,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떠밀려 흐른다. 아버지, 언니, 애루(동생) 인순이, 나 이렇게 넷도 어딘가로 가긴 가야 했다. 하지만 그 살갖은(따슨) 시골에서 우리만이 저녁을 못 해먹어 배가 고파 떠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봉자네서 돼지나 주는 톨감자 한 말을 꾸어다 냇가에서 벅벅 씻었다. 그을린 솥에 붓고 막소금을 뿌린 다음 보리 짚으로 삶아 먹고 넘어가는 남태령 고개.

꽝! 한강 다리가 깨지는 소리라는 말이 들리자 뛰는 사람이 많았다. 성환쯤 갔을까.

“점례야, 아버지, 어머니.” 부대끼는 소리보다 더 큰 소리가 들려왔다. “야 홍렬(아버지)아 이 새끼야, 넌 어째서 피난을 가면서 빈손으로 가냐? 남들은 죄 메고 끌고 가는데.” 아버지의 끈끈한 벗 풍언 아저씨였다.

어쨌든 이때 우리 아버지의 맞대(대답)는 내 한살매의 어림빨(상상력) 그 나래가 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야, 온 땅덩이에 불이 붙었을 땐 목숨만 챙겨 가면 되는 거야. 제 것이나 꽁쳐 가려고 하면 속에서 이는 싸움 땜에 먼저 죽어 인석아.”

‘온 땅덩이에 불이 붙었을 땐 목숨만 챙겨 가면 된다고?’ 나는 그 말을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우리 밥네(식구)를 놓치고 말았다. 얼마쯤 가는데 쌕쌕쌕, 처음 보는 비행기가 날아가자 웬 뜅뜅한 아저씨가 하늘에 대고 소릴 지른다.

“미군 아저씨들, 북쪽에 원자탄을 퍼부으려고 가는 거죠. 한방 갖고는 안 됩니다, 북쪽 놈들 씨를 말리라구요.”

얼마 있다가 쌕쌕이가 날아가자 또 그런다. 나는 핏대가 울컥했다. ‘원자탄을 떨어뜨릴 것이면 북쪽에 계시는 우리 엄마이가 죽는데…’ 그래서 말 한마디 한 것뿐이다. “아저씨, 그러질 말아요. 원자탄이 떨어지면 다 죽는 거라구요.” 그래 말했다고 나를 헌병대에 끌고 가 “이 새끼, 이거 빨갱이 새끼니까 해치워 달란다.” 한참을 쭈그리고 있는데 헌병이 묻는다. 왜 잡혀 왔느냐고. 그래서 “북쪽에 원자탄을 떨구자고 해서 집어치우라고 한 것뿐”이라고 했더니 찬찬히 쳐다보다가 “아새끼, 죽이긴 아깝구나. 너 임마, 취미가 뭐야?” “나요, 축구요.” “뭐, 축구가 취미라고? 그래그래 축구 좋아하는 놈은 거짓말은 안 해, 나가” 그런다.


한참을 걸어 나와 막 사람들 틈에 낑기려는데 아까 그 아저씨가 “야 임마, 넌 아직 덜 끝났어 임마” 그러는 때박(순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냥 받아버리고 말았다. 벌러덩하는 것을 마저 밟으려다가 그만두고 서둘러 가는데 이참엔 군인들이 그 자리에서 군대를 뽑는다며 차에 타란다. 나 같은 애들도 있고 어른들도 있다. 붕~ 한참을 달리다 빗길에 곤두박히던 생각은 난다. 깨어보니 캄캄한 밤, 나 혼자 논바닥에 곤두박혀 있어 “사람 살리라”고 소릴 질렀다.

백기완
그런데 맞대는 없고 어디서 노랫소리만 가냘프게 들려 벌벌 기어갔다가 나는 끔찔하고 말았다.

총을 맞은 젊은이가 총을 맞고 죽은 아내를 안고 울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까닭이매 코큰 애들이 아내를 건드리려고 했단다. 그러자 그 착한 아내가 돌멩이로 까다가 총에 맞고 사내가 총을 뺏어 갈기다가 이렇게 됐다며 노래를 부른다. 서울서 온 나도 처음 듣는 노래다.

‘어머니의 손을 놓고 돌아설 적에/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흐르듯 잦아들며 죽어가고 있다.

“아저씨, 아저씨 집은 어딘데요?” 소릴 지르는데 덜썩, 하고 고개를 떨군다.

사내도 아내도 새파란 젊은이들, 그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간들(운명)이 달라진 것이다.

전쟁이라는 것에 마주해(대해) 나는 두억이(송장귀신)보다 더 무서움이 다그쳤다. 손가락이 굵은 것으로 보아 씨갈이꾼(농사꾼), 그 착한 젊은이들은 왜 죽어야 했으며, 그들을 죽인 놈들은 누구란 말인가. 사람들은 전쟁이 죽인 것이라고 할 테지. 하지만 어린 나는 그렇게 생각되질 않았다. 전쟁이 죽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였다. 아니다,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죽음으로 싸워 사람다움을 지켜낸 것이니, 참말로 전쟁이란 무엇일까. 잿더미인가, 아니다, 죽고 죽이는 가운데서도 가장 사람다움을 세우려는 거, 그게 내가 겪은 첫눈의 전쟁이었다. 통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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