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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이른 겨울, 혼례잔치를 끝낸 뒤 신부 김정숙(오른쪽)씨와 남산 오름길에서 나란히 선 필자(오른쪽). 남아 있는 유일한 결혼 기념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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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나의 한살매
나는 1956년 여름, 경기여자고등학교 강당에서 박동묘 교수(서울 상대)와 ‘씨갈이바투(농촌현장)를 깨우치자’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무튼 핏대 좀 세웠다. 그것을 때박(계기)으로 김정숙이라는 가시나(덕성여대 3학년)를 만난 지 5분이 채 안 돼서다. “이봐, 나하고 한살매(한평생)를 맺자우” 그랬더니 어이가 없었던지 냅다 달아난다. 얼마 뒤 또 그랬더니 또 비키려는 것을 나는 가로막았다. 내 속맴을 털어놓은 것이다. 첫째, 그대는 마음과 몸이 욱끈(건강)해 보여 그냥 으스러뜨리고 싶다. 둘째, 그대의 얼굴은 샘보다 더 맑아 그냥 들이키고 싶다. 셋째, 그대의 손이 너무 예쁘다. 꼭 쥐고선 한없이 열린 널마(대륙), ‘저치’를 가고 싶다. 그리하니, 정말이냐, 좋다. 다만 댓님(당신)은 부러진 땅덩이를 하나로 하고, 나는 흩어진 집안을 삶터로 일으키겠다고 한다. 나는 대뜸 날을 잡고 알림을 띄웠다. 그러나 알짱(시비)도 만만치 않았다. “너 같은 털털이한테 누가 오겠느냐, 거짓말이다” 그런다. 나는 “이봐, 가시나는 오는 게 아니야. 찾아가는 거야”라고 물리쳤다.또 어떤 녀석은 “집도 없고 숟갈 셋밖에 없는 집에 누가 시집을 오겠느냐”고 한다. 나는 “가시나가 왜 사내네로 살러 온다드냐. 우리는 손을 잡고 한없이 열린 널마로 사랑을 심으로 갈 거라”고 떵떵 쳤는데 아뿔싸 참말로 글러지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신문, 방송이 떴다는 것이었다. “휴전선을 넘어오던 간첩 백기성이가 잡혔다”고. 백기성이라면 내 언니(형) 이름과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바로 내 맨 큰언니라, 하는 수 없이 알림을 거두고 다니자 그 새찰대던(홀락대던) 알짱이 톱살(욕)이 된다. “색시는 무슨 색시, 그 새끼 거짓말 부렸다”고, 더구나 가시나네 집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고 벅적이고. 어쩌질 못해 다시 날을 잡아 알림을 돌렸다. 그런데 그날이 바로 가름날(재판날)이라고 돈 안 받고 언니를 돕는 박한상 변호사가 말해 또 거두게 되자, 나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오로지 발가락만 썽이 나 덕수궁 돌담길 빈 깡통을 뻥뻥 차며 걷는데 누가 툭툭 친다. “누구야?” 막 내지르려는데 뜻밖에도 인천 사시는 허섭 언니다. “기완이 너, 왜 그러구 다녀?” “아무튼 오늘은 그만 헤어집시다.” “차라도 한 모금 걸쳐야지, 모처럼인데….” 그래서 광화문 국제극장 두걸(이층) 찻집에서 마주앉아 내 딱함을 털어놓았다. 좋은 색시가 있어 잔치한다고 알림까지 돌렸으나 북쪽에서 큰언니가 오시는 바람에 알림을 두 술씩이나 거두게 되었다고 하자 언니의 말씀이었다. “언니가 더 좋아할 텐데.” “뭐이 있어야지요. 잔치가 되어야 돈을 좀 거두어 눌데(방)라도 하나 얻으려고 했는데 거짓말을 한 것이 되었으니.” “그래? 그러면 하제(내일) 아침 열한 때결(시)쯤 여길 나와.” “안 나올랍니다, 모든 게 싫은걸요.” “아무튼 나와, 내 기다릴게.” 마지못해 나갔더니 대뜸 두툼한 보따리를 밀어주며 가보란다. 찻집 걸돌(층계)을 내려서며 풀어보았다. 놀랄 일이다. 돈 15만원이다. 그즈음 대학에 내는 돈이 1만5천원쯤이었으니 열 사람 한 학기 값인 셈이다. 나는 그 돈으로 눌데도 얻고 잔치도 치르고 여태껏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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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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