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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19 18:45 수정 : 2008.11.19 18:45

백기완-나의 한살매 34

‘죄 많은 내 청춘’, ‘얼마나 눈물 바닥을 더 바싹 말려야 네가 올 거냐.’, 이런 말귀들은 그냥 말귀가 아니다. 칠성판 위에 나를 엎어놓고 눈깔을 부라려 치던 그 쇠꼬리 채찍일 때가 있다.

‘갯가의 눈물’이라던 아주머니가 떠올라서 그렇다. 그 아주머니는 나보다는 예닐곱쯤 더 들었으나 얼굴은 마치 눈 위에 핀 박꽃처럼 주름 하나 없고 땅불쑥하니(특히) 그 앉은 품새(인품)는 맑은 냇물가 강냉이대처럼 하늘댄다고나 할까. 어쨌든 나보다도 내가 하는 일이 쏙 든다고 술값을 안 받는 게 아니라, 아예 주머니에 손도 못 가게 했다. 그래서 자주 갈 수가 없었다.

박정희가 몰아붙이던 이른바 ‘한일협정’은 일본이 다시 쳐들어오는 길을 터주는 거라, 앙짱 부시자고 아우내를 치다가 경찰에 쫓겨 을지로 네거리 뒷골목까지 밀렸을 적이다. 나는 잽싸게 어느 썰렁한 들락(문)을 열며 “선생님, 빨리요!” 그러자마자 들락을 홱 닫아버렸다. 함석헌 선생, 계훈제 선생, 이두수 목사가 놀란다. 여기가 어디냐고.

내가 말을 하지 않는 까닭은 어느새 그 집 아주머니가 불을 탁탁, 끄더니만 술올리게(술상)를 들고 와 사그리 풀리고 말었다. 쫓아오던 경찰이 들락을 탕탕탕, 미념(소용)이 있으랴!

거나해진 내가 ‘두만강’을 부르자, 얼씨구 그 아주머니가 ‘으악새’를 부르더니 푸념 같은 추임새까지 넣는다. “아, 죄 많은 내 청춘”, “아, 얼마나 눈물 바닥을 더 바싹 말려야 네가 올 거냐.”

컴컴한 마루가 그렇게 돌아가자 함 선생이 멋쩍으신지 일어나시려고 한다. 아주머니가 “선생님, 높떵소리(찬송가)가 아니어서 그러십니까? 우리 무지랭이들의 높떵은 바로 이거거든요.” 그러면서 거퍼 부르다가 밤이 깊어지자 함 선생은 허리춤에 꽁쳐두었던 몇 푼을 내놓으며 일어서신다. 따라 일어서는데 함 선생이 내놓으신 돈을 도루 쥐여드리며 수레(차)를 타고 가시란다. 함 선생은 뭔질 몰라 어리둥절하신다. 나는 “선생님, 조선의 아줌네(여인)하면 ‘황진이’다, ‘허난설헌’이다 그러질 않습니까. 하지만 요즈음은 ‘갯가의 눈물’입니다.”

그 ‘갯가의 눈물’이 하루는 명동 ‘송옥’ 찻집으로 나를 찾아와 쌀 한 가마니만 만들어 달란다. 그리 해주기만 하면 다시 술집을 열겠단다. 그 도막에 그 술집을 닫은 줄도 모르고 있던 나는 너무나 안쓰러워 알겠다고 했지만 매긴 때결(시간)엔 나가질 못하고 말었다. 쌀 한 가마니? 한 되도 못 만든 것이었다. 남의 집 먹개(담)를 넘어서라도 그것을 만들었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백기완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나고 나서 무슨 일로 집엘 못 들어가고 있었다. 벙거지를 눌러쓰고 어느 밥집엘 갔더니 바로 그 아주머니가 있다. 모르는 체 밥 한 그릇을 뚝딱하고 나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손을 잡아 무언가를 쥐여준다. 경찰인 줄 알고 뿌리치다가 곁눈으로 보니 돈 이천원이다. “얼마 안 되지만 언제 다시 와도 난 여기 없을 거야.” 그런 눈짓이더니 “왜요?” 하고 물을 짬도 안 주고 밀어낸다.

그러고 나서 또 몇 해가 지났다. 뒷골목을 비실대는데 어느 집에서 ‘으악새’가 들려온다. 사뭇 그 아주머니 같아 들여다보니 아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있어보자, 얼추(혹시) “얼마나 눈물 바닥을 더 말려야 네가 올 거냐”는 추임새가 나올지도 모르지 그러는데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렵니다.”

나는 마치 젓님(연인)을 빼앗긴 것 같애 ‘에이 퉤!’ 마른 가래를 뱉고선 골목을 돌아서다 덜컥 잡히고 말었다. 나를 잡은 녀석이 신이 나는지 수레를 몰면서 ‘으악새’ 노래를 휘파람으로 분다. “이참 때속(감옥)으로 가는 거요, 아니면 막쐬주집으로 가는 거요?” “그건 알아 뭘 해.” “막쐬주집으로 안 갈 거면 그 ‘으악새’ 노래는 좀 집어치우라 그거요.”

몇 해 있다가 다른 일로 잡혀가 오늘이냐 하제(내일)냐 할 적 ‘으악새’ 노래가 들려왔다. 또다시 뼈저린 뉘우침이 나를 죽여주었다. 그때 나는 왜 돈놀(은행)을 털어서라도 그 아주머니한테 쌀 한 가마니를 못 해 드렸을까? 그러면서도 사나이를 말하고 널마(대륙)를 쳐들고 불쌈(혁명)을 주접떠는 너는 개불(낙오자)도 못 돼, 이 새끼야, 맞아죽어 싸, 이 새끼야. 갈려고 하면 한술쯤은 제대로 뉘우치기라도 하고 가, 이 못난 새끼야. 아, 그 아주머니는 아직 살아나 계실까. 꼭 쌀 한 가마를 메고 가고 싶은데…. 통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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