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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백범 김구 선생 동상제막식에 참석한 철기 이범석 장군(가운데). 철기는 청산리전투를 이끈 사령관이자 광복군 중장으로 백범과 함께 항일운동을 했지만, 귀국 이후 백범과 다른 길을 걸었다. <우둥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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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나의 한살매 35
1964해 봄, 나는 들랑이(재야)들에게 박정희가 밀어붙이는 ‘한-일 협정이란 무엇인가?’라는 도틈(제목)으로 말을 하게 되었다. 나는 젊고 또 들랑이의 알기(중심)도 아닌데 그런 다부(부탁)를 받게 된 것은 장준하 선생 때문이었다. 하루는 장 선생이 날 찾아와 이범석 장군을 만나러 같이 좀 가잔다. 싫다고 하자 내가 가야 장군을 한-일 협정 깨뜨리기 싸움에 나서게 할 수가 있으니 가잔다. 그럴 힘이 없는데 …, 아니란다. 다 알고 왔다고 우겨 따라갔더니 똑뜨름(역시) 한때 장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딘가 찜찜한 게 있었다. 먹개(벽)에 즐비하게 걸린 여러 짐승 머리들이 처음 보는 나에겐 꼴사나웠다. 그래서 “장군님, 이 짐승들은 모두 왜놈을 꼬꾸라뜨리던 총 솜씨로 잡은 것이지요?” 그렇다고 껄껄 웃으실 때 나는 “장군님, 그 총부리를 왜놈들에게 겨냥할 때가 왔습니다. 왜놈들이 박정희의 냄(안내)을 받아 다시 쳐들어오는 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장군님이 다시 나서야 저희들도 따라 나서겠습니다.” 움찔 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거퍼 “장군님, 장군님의 옛솜씨가 어딜 갔겠습니까? 믿고 일어나겠습니다.” 장충동 어디쯤을 돌아드는데 장 선생이 “백 선생 놀랬어, 아무튼 갑시다.” 따라가 실컷 마신 것이 끈매(인연)가 돼 들랑이들에게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장군은 안 나서고) 교수·목사·정치꾼 몇 모두 여남은쯤 되는 사람들이 매우 으슥한 곳에서 불도 끄고 몰래 모였다. 들키는 날엔 죽어도 내가 먼저 죽으니까 목숨으로 내뱉은 말은 이러했다. 첫째, 말이 한-일 협정이지 그것은 부러진 우리 땅에 부셔(적) 일본을 다시 쳐오게 하는(재침략) 무서운 꿍셈(음모)이다. 둘째, 한-일 협정은 박정희를 내세운 미국의 한반도 거머쥐기지 외교관계가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갈라짐을 아주마루(영구)로 갈라놓으려는(영구분단) 꿍셈이요, 따라서 통일 어쩌고 하는 사람들을 몽땅 없애겠다는 것이다. 셋째, 한-일 협정이 일구어지면 남쪽은 미국 및 일본 독점자본주의에 매이는 더부땅(식민지)이 되고, 일본 돈을 밑천으로 박정희 군사 막틀(독재)은 더욱 거세지고 더구나 일제가 꼬꾸라지지 않는 한 박정희 막틀은 물러날 수 없는 아주마루 막틀(영구독재)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대루(자유)다, 뭐다 하는 것은 깡그리 죽게 되니 한-일 협정 깨부수기는 새로운 바름꺼리(해방운동), 새로운 통일꺼리라. 어떡허든 일구어야 한다고 매듭지었다. 떠방(반응)은 세 갈래로 나왔다. 교수 몇은 “찔러야 할 꼭짓점은 다 찔렀다. 하지만 그런 투의 한-일 협정 깨부수기 싸움엔 앞장설 수가 없다.” 또 몇몇은 “백기완이의 말따구는 너무 무섭다.” 그러자 한쪽에선 “아니다, 백기완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 겨레의 나아갈 길을 뚜렷이 보여주었다.”(장준하·계훈제·김성식·함석헌) 어쨌든 오늘 모임은 저녁만 먹었던 것으로 하자 하고 자리를 떴다. 나는 매겼다. 한-일 협정 깨뜨리기의 알기(주체)는 들랑이들에게 맡길 수는 없겠다고. 그래서 그해 여름 강나루 흘떼(강) 한가운데 됫마 하나를 띄우고 나는 젊은이들을 만났다.(하루 뱃값은 칠백 원) 밤이 깊으면 한동학, 이두수 목사가 번갈아가며 뱃값을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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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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