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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20 19:09 수정 : 2008.11.20 19:09

1969년 백범 김구 선생 동상제막식에 참석한 철기 이범석 장군(가운데). 철기는 청산리전투를 이끈 사령관이자 광복군 중장으로 백범과 함께 항일운동을 했지만, 귀국 이후 백범과 다른 길을 걸었다. <우둥불>에서

백기완-나의 한살매 35

1964해 봄, 나는 들랑이(재야)들에게 박정희가 밀어붙이는 ‘한-일 협정이란 무엇인가?’라는 도틈(제목)으로 말을 하게 되었다.

나는 젊고 또 들랑이의 알기(중심)도 아닌데 그런 다부(부탁)를 받게 된 것은 장준하 선생 때문이었다. 하루는 장 선생이 날 찾아와 이범석 장군을 만나러 같이 좀 가잔다. 싫다고 하자 내가 가야 장군을 한-일 협정 깨뜨리기 싸움에 나서게 할 수가 있으니 가잔다. 그럴 힘이 없는데 …, 아니란다. 다 알고 왔다고 우겨 따라갔더니 똑뜨름(역시) 한때 장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딘가 찜찜한 게 있었다. 먹개(벽)에 즐비하게 걸린 여러 짐승 머리들이 처음 보는 나에겐 꼴사나웠다. 그래서 “장군님, 이 짐승들은 모두 왜놈을 꼬꾸라뜨리던 총 솜씨로 잡은 것이지요?” 그렇다고 껄껄 웃으실 때 나는 “장군님, 그 총부리를 왜놈들에게 겨냥할 때가 왔습니다. 왜놈들이 박정희의 냄(안내)을 받아 다시 쳐들어오는 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장군님이 다시 나서야 저희들도 따라 나서겠습니다.” 움찔 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거퍼 “장군님, 장군님의 옛솜씨가 어딜 갔겠습니까? 믿고 일어나겠습니다.”

장충동 어디쯤을 돌아드는데 장 선생이 “백 선생 놀랬어, 아무튼 갑시다.” 따라가 실컷 마신 것이 끈매(인연)가 돼 들랑이들에게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장군은 안 나서고) 교수·목사·정치꾼 몇 모두 여남은쯤 되는 사람들이 매우 으슥한 곳에서 불도 끄고 몰래 모였다. 들키는 날엔 죽어도 내가 먼저 죽으니까 목숨으로 내뱉은 말은 이러했다.

첫째, 말이 한-일 협정이지 그것은 부러진 우리 땅에 부셔(적) 일본을 다시 쳐오게 하는(재침략) 무서운 꿍셈(음모)이다.

둘째, 한-일 협정은 박정희를 내세운 미국의 한반도 거머쥐기지 외교관계가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갈라짐을 아주마루(영구)로 갈라놓으려는(영구분단) 꿍셈이요, 따라서 통일 어쩌고 하는 사람들을 몽땅 없애겠다는 것이다.

셋째, 한-일 협정이 일구어지면 남쪽은 미국 및 일본 독점자본주의에 매이는 더부땅(식민지)이 되고, 일본 돈을 밑천으로 박정희 군사 막틀(독재)은 더욱 거세지고 더구나 일제가 꼬꾸라지지 않는 한 박정희 막틀은 물러날 수 없는 아주마루 막틀(영구독재)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대루(자유)다, 뭐다 하는 것은 깡그리 죽게 되니 한-일 협정 깨부수기는 새로운 바름꺼리(해방운동), 새로운 통일꺼리라. 어떡허든 일구어야 한다고 매듭지었다.

떠방(반응)은 세 갈래로 나왔다. 교수 몇은 “찔러야 할 꼭짓점은 다 찔렀다. 하지만 그런 투의 한-일 협정 깨부수기 싸움엔 앞장설 수가 없다.” 또 몇몇은 “백기완이의 말따구는 너무 무섭다.” 그러자 한쪽에선 “아니다, 백기완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 겨레의 나아갈 길을 뚜렷이 보여주었다.”(장준하·계훈제·김성식·함석헌) 어쨌든 오늘 모임은 저녁만 먹었던 것으로 하자 하고 자리를 떴다.

나는 매겼다. 한-일 협정 깨뜨리기의 알기(주체)는 들랑이들에게 맡길 수는 없겠다고. 그래서 그해 여름 강나루 흘떼(강) 한가운데 됫마 하나를 띄우고 나는 젊은이들을 만났다.(하루 뱃값은 칠백 원) 밤이 깊으면 한동학, 이두수 목사가 번갈아가며 뱃값을 가져다 주었다.

백기완
1965해 6월 어느 날이다. 을지로 ‘흥사단 강당’에서 함석헌·변영태·나 이렇게 셋이서 한-일 협정을 깨부수자고 외치고 나아가다가 붙들려갔다. 홀랑 벗겨졌는데 함 선생의 주머니에선 그래도 몇 만원이 나왔다. 그런데 내 주머니에서는 한 푼이 안 나오자 검사가 다그친다.

“땡돈 한 닢 없이 어떻게 한-일 협정을 깨뜨리고자 했는가? 댓님(당신)은 홍길동 아닌가?”

“이봐요, 겨레를 바로 세우자는 뜻을 왜 돈으로 셈하는 거요. 나에겐 돈은 없어도 랭이(민중)가 있고, 갈마(역사)가 있으니 날 잡아넣으시오. 그렇질 않으면 엄청 몰아칠 거요.”

그런데 학교라는 뒤도 없고 떼(무리)도 없다고 나가란다. ‘날 나가라고?’ 맴이 뒤틀려 다시 배를 띄웠는데 달이 밝았다. 김홍일 장군, 양일동 선생이 찾아와 나를 높이 샀지만 하염없었다. ‘목숨으로 한-일 협정을 깨뜨리고자 했는데 이게 뭔가, 저 달이여 말해 다오!’ 하고 흘떼(강)에 뛰어들었다. 깨어보니 뱃사람의 집이다. 아저씨가 “이봐 흘떼는 뛰어드는 데가 아니야, 저어가는 데지. 내 손을 좀 봐, 한살매를 터지도록 저어보아야 겨우 밥이나 먹는 나 같은 뱃놈도 있는데 뚤커(용기)를 내, 뚤커.” 통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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