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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24 19:01 수정 : 2008.11.26 10:23

1967년 처음 세운 통일문제연구소는 간판조차 내걸 수 없었던 까닭에 사진 기록도 전혀 없다. 89년 봄 국민들의 성금 덕분에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셋집을 얻어 다시 문을 열면서 집들이를 하던 날 모습이다. 필자 바로 옆이 임진택씨, 그 옆이 당시 사무장 홍선웅 화백이다.

백기완-나의 한살매 37

 한 해에 두 술씩이나 집을 옮기다가 다시 한데에 나서게 된 날 아내가 하는 말이었다.

 “언마(장모)네 똥뚝을 헐어 거기다가 비둘기집이라도 지으려고 하니 오늘만큼은 사람 한술 돼 보란”다. “어떻게?” 돈 삼만 원을 주면서 세면과 세면벽돌을 좀 사다놓으란다. “그러지 뭐” 하고 나서는데 지나던 벗들이 “야, 집은 벽돌로만 짓는 줄 알아. 씨원한 막걸리로도 짓는 거야.” 그 으름장에 홀랑, 나는 갈 데가 없었다. 명동찻집에서 한 열흘을 죽치고 있는데 구두닦이 꼬마가 “아저씨, 밖에서 누가 찾아요.”

 바로도 못 보고 요렇게 내려다보니 아내다. 뛰어 내려가 차나 한 모금 하자고 해도 눈만 가로 쏜다. “손바닥만한 집의 파리채만한 똥뚝이 헐린 그 자리가 모진 장마에 웅덩이가 됐으니 어떡할 거냐, 그러고도 사내냐!” 아무튼 올라가 이야기나 하자고 해도 그냥 가는 아내의 뒤를 보니 고무신을 철럭인다.

 그 들썩한 명동에서 고무신을 신은 초등학교 선생은 아내뿐이라, 갑자기 내 눈깔에선 묵은 도끼가 날을 세웠다. 무언가를 꼭 저지를 것만 같았다.군사 양아치가 됐든 코배기의 핵폭탄이 됐든 걸리기만 하면 그저 앙짱(박살)을 내려는데 뜻밖에도 김성래가 나타났다.

 “야 성래야, 내가 이렇게 돼서. 집 좀 지어달라우. 세면 같은 건 아마 사 줄 거야!”

 “그러지 뭐!”

 경기고 출신에다 당구가 오백, 한마디로 씨원한 벗이었다. 아무튼지 정종관과 그렇게 애를 써도 바쁜 체 코빼기도 안 내밀었는데 마침내 삐까집(똥뚝집)을 다 지어놓았다. 쐬주 한 모금 받아주질 못했다. 고얀 것은 다 모둔 땅지(사람 아닌 사람), 바로 그 땅지라는 것을 뻐기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엉뚱한 뚱속(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이참 박정희의 등빼기(반역성)라고 할까. 박정희의 그 헷술(약점)은 무엇이더냐. 그건 첫째, 댄한나(반통일)다. 댄잔잘(반평화), 댄고루(반균등), 댄대루(반자유), 댄맑티(반문화), 댄랑(반예술), 댄갈마(반역사), 댄나아감(반진보)이라. 따라서 박정희는 한나(통일)를 갖다 대기만 하면 이내 허물어진다.

 그러면 어떻게 한나라는 뜸꺼리(문제)를 들이댈까. 먼저 한나뜸꺼리(통일문제)를 캐는 모임, 통일문제연구소를 만들자. 그런데 그 낯통(간판)은 어디다 달까. 딴 덴 없다. 바로 우리 삐까집 앞에 걸게 된 것이(1967) 아마도 우리 연구소의 첫발일 터이다.

 하지만 미념(소용)이 없었다. 아닌 밤에 누군가가 와서 그 종이 낯통에 불을 지르고 간다. 불끈(노여움)이 나 또 붙이면 또 불을 지르고 나무때기로 달면 아예 도끼로 쪼개서 불을 지르고, 낯통인들 붙일 데가 없었다.

 고인한네가 하는 ‘영화약품’의 낯통 옆에 달았더니 이참엔 그를 잡아다 욱질러 내보낸다. 이로 말미암아 출출할 때 술도 한 모금 못 얻어먹게 되자, 나는 우리 연구소를 내 등 뒤에 지고 다닌다고 했고 이 때문에 계훈제 선생은 내 이름을 ‘백한나(통일)’로 고쳤다고 껄껄 웃기도 했다.

 어느날 명동 술집에서 군인들끼리 싸움이 붙었다. 월남에서 왔다는 장교가 무턱대고 총을 빵빵, 견디다 못한 내가 “이봐 젊은이, 총을 쏘려고 하면 과녘을 쏴야지, 죽일 놈들 많잖아.” “뭐 이 새끼야, 죽일 놈은 바로 너야”라고 대드는 걸 살짝 비켰는데 벌러덩, 떨어진 총을 밟고선 “이봐 총이 없으니 어떡할래? 같이 총을 잡을래, 아니면 주먹으로 할래?”

 “네, 어르신네 잘못했습니다.”

 “그럼 술이나 한 모금 부어 임마.”

 “네, 오늘 이 술값은 어르신네의 것까지 몽땅 제가 내겠습니다.”

 “그 돈이 어디서 난 건데? 월남에서 훔쳐온 거 아니야.”

 “아닙니다. 제 품삯인뎁쇼.”

 “그럼 많이 들어”

 하고 나오는데 “어르신네께서는 무얼 하시는 분이신지?”

 

백기완
“거 왜 박정희라는 사람 알아? 그 사람은 자네들을 시켜 갈라진 땅만 지키자 그러질 않어. 하지만 나는 갈라진 땅을 하나로 하자는 통일, 그 한나를 일구는 일을 하지.”

 “정말이십니까? 그러면 배포가 크시겠네요.”

 “암, 내 배포야 이 땅별(지구)을 하나로 하자는 거지.” “저도 낑겨주시면 ….” “하지만 총은 안 차고 와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통일문제연구소가 처음으로 혓차(칭찬)를 받은 짜통(사건)이었을 거다.

통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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