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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나의 한살매 39
요새도 명동에 그 집이 있는지 몰라? 두아짐집(쌍과부집), 거기서 이른 저녁부터 깡술로 배를 채우고 있는데 한다 하는 집마름(건축가)들이 찾아왔다. 1967해일께다. 김중업·김희춘·김재철·강명구·나상진(나보다 열 살 위). “어연 일이십니까?” “나라에서 정부종합청사 짓나(설계)를 널리 모았는데 나 선생 것이 뽑혀 짓나돈(설계비) 천육백만 원까지 받었다. 그런데 정부에선 뒷구멍으로 미국 집마름의 짓나를 또 받고 그 짓나돈은 나 선생보다 열 곱도 더 주고 이 나라 정부종합청사를 짓겠다니 말이나 되는가? 또 그 집마름은 베트남 전쟁터에서 똥뚝간이나 그리는 미국 사람이요, 그것도 전쟁 뒤 러시아에서 집들을 빨리 짓고자 하는 ‘케이슨 적투’(공법), 대포 한 알에도 와르르하는 것이라, 그렇게 지어선 안 된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해서 찾아왔다”고 한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박정희 막틀(독재)의 조국 근대화 정책과 맞싸움이 일겠군요.” “뭐요? 조국 근대화 정책하고 맞붙는다고요. 이게 그렇게 커단 뜸꺼리(문제)입니까. 어떻게 해야겠어요?” “글쎄” 그러면서 나는 얼마 앞서 나 선생과 했던 댓거리를 더듬어 보았다. “나 선생, 거 집 짓는 거 말이요, 서른 평, 삼백 평, 삼천 평, 가진 사람들이 서로 제 땅 위에 집을 올려 지으면 땅 없는 사람들은 살 수가 없습디다. 땅도 하늘도 땅 가진 사람 나름으로 차지하니 쓸모도 없고 땅 없는 사람들은 고약하던데요.”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마주(도시)란 온 마주 사람들의 것이래야 되고, 또 그래야 집마름꾼이 참짜 랑이(예술가)가 될 수 있는 거지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허물없이 지내게 된 사이라. 나는 이렇게 물었다. “얼추(혹) 다른 집마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요.” “많은 이들이 뿔을 돋치고 있습니다.” “그럼, 됐는데요. 곧바로 다 모여 저녁이나 같이 하시지요. 저도 낑겨주면 나가겠습니다.” 그리하여 여럿이 둘러 앉은 자리에서 나는 주는 술은 딱 한 모금도 안 넘겼다. 사람들이 왜 그러냔다. 나는 그저 말만 한마디 했다.“여러분들은 다 랑이(예술가)들입니다. 따라서 이참에 정부에서 하는 꼴을 보니까, 이 땅 집마름들의 나척(권리)만 짓밟는 것이 아닙니다. 랑이의 목숨인 뻗대(자존심)까지 짓이기자는 것이니까, 모든 집마름들의 리킴(궐기) 모임을 한술 가져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랬더니 ‘주발’(공청회)이라고 했었던가. 아무튼 ‘신문회관 마루’에 가득 모였다. 거기서 김중업·김수근·김희춘·김재철 선생이 다투어 짓밟히는 집마름의 부척을 살리자고 외쳤고, 나도 랭이(시민)의 굴낯(대표)이랍시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그 때 <한국일보>, <동아일보>(1968년 2월22일치)가 받아 써놓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의 짓나는 그 다락(수준)이 얕아 못쓰겠다니, 그건 개수작입니다. 미국은 이백 해 앞서까지 기껏 채알(천막) 속에서 살았지만 우리는 푸근한 이응집(초가집)과 쓸모 많은 잿집(기와집), 그 집짓기의 잇줄(전통)을 여러 천 해 솟굿(발전)시켜 온 맑티(문화)가 있는데도 그런다면 그건 조국 근대화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이제 조국 근대화와 단 한 치인들 물러설 수 없는 싸움에 나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싸움은 이 땅 랑이(예술가)들과 미국의 엉터리 랑이가 맞붙는 싸움이라 이기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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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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