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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용 ‘삼선 개헌’ 시도를 막고자 전국을 돌며 반대운동에 나선 고 장준하 선생(당시 신민당 국회의원)이 한 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필자 역시 장 선생의 권유로 박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 선산 집회에 나섰다가 불구속 기소를 당하기도 했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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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나의 한살매 40
내 나이 서른여섯살 되던 1969년, 나는 입에 거품을 물고 ‘우리 쇳소리를 내자’는 말뜸(화두)을 들고 다녔다. 미국은 베트남 온 고을을 불바다로 만들며 이 땅별(지구)을 몰아죽이고 있고 박정희는 대들할(헌법)을 또 바꿔 막틀(독재)을 늘쿠고자 하는데도 모두 헷소리만 치고들 있으니 이때야말로 쇳소리를 내자고 으르고 다녔다. 장항에서 오는 천수레(완행열차) 안에서 채희완(부산대 교수)을 만나자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이 땅은 이참 딱 셋이 없는데 그게 무언 줄 아나. 춤은 있으되 날래(해방) 사위는 없고, 굿(연극)은 있으되 랭이(민중)들의 꿈은 없고, 소리는 있으되 쇳소리가 없는 것이니 큰일 아니겠나. 그러니 자네들이 목숨을 걸고 나서야 할걸세.” 많이 마셨다. 그 뒤 박재일과 김지하를 만났다. “왜 그리 수척하십니까, 우리 영덕에라도 가서 한 이틀 자시다 오시지요?” “좋지.” 그러고선 우리 집에서 함께 자고 막 떠나려는데 장준하 선생한테서 묻길(기별)이 왔다. 박정희가 밀어붙이는 장기집권 꿍셈(음모)을 물리치느라 가는 길이니 오늘 늦은 한낮 서울역으로 나오라고. 오늘 만은 안 되고 다음에 보자고 했는데 양일동 선생(삼선개헌반대투위 사무총장)에 이어 장 선생의 묻길이 또 왔다. 나들이 돈은 있다, 몸만 오면 된다고. “여보게, 이거 안됐구먼” 하고 박재일과 김지하와 헤어져 서울역에서 충청도 도고에 닿으니 벌써 김상돈 선생, 이민우 선생이 와 있어 우리들은 이마를 맞댔다. 하제(내일) 낮, 박정희 라비(고향) 선산에서 목숨 건 유세를 해야 한다. 거기서 비슷한 이야기가 겹치지 않도록 하자고. 나보다는 서른 살이나 윗분들이라 어렵긴 했지만 ‘유세’라는 말보다는 ‘덤불’이라고 하지요. 여기저기 덤덤이 불고 다닌다는 ‘덤불’. 젊은이가 꼭값스럽다고 한참 웃다가 젊은 백기완이는 그럼 어떤 이야기를 하겠느냔다.“저는 쇳소리를 내고 싶습니다.” “쇳소리라니?” “네, 박연 물떨기(폭포)의 떳다고는 소리와 몇 해 동안 피눈물로 맞짱을 떠 소리를 얻은 사람이 으스대고 내려오질 않겠습니까. 하지만 밭에서 김을 매던 씨갈이꾼(농사꾼)들은 ‘녀석, 너는 임마, 소리는 얻었어도 네 소리엔 쇳소리가 빠졌어, 임마’ 그럽니다. 무슨 말이냐, 뜨거운 밭고랑에서 진땀, 박땀, 빼땀까지 흘려가며 밭을 매다 보면 지쳐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 막된 고비를 넘어 가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그걸 쇳소리라고 합니다. 또 죽어라 하고 일을 해 보았자 그 땀의 열매는 몽땅 땅 알범(주인)이 다 가져가고 나면 온몸이 칼날이 되어 부들부들 떨게 됩니다. 그렇게 떨질 않으면 자지러질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윙윙 울게 됩니다. 그게 쇳소리고요. 또 사람은 살다 보면 엄청 슬픔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도 제 힘으로 헤어 나와야 하는데 힘이 있어야지요.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가 있나요. 스스로를 달구고 을러대되 제 힘만 달구어선 안 됩니다. 꿈을 함께 내대야 합니다. 그게 바로 쇳소리지요. 이참 우리는 박정희가 파놓은 구덩이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도 달구어야지만 우리들의 하제(희망)를 빚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쇳소리라 그 소릴 내고 싶습니다.” “어허, 젊은 백기완이의 그 쇳소리 한술 들어보아야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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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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