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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월 유신헌법 철폐와 개헌 청원 서명운동을 벌여 이른바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된 필자(왼쪽)와 장준하(오른쪽) 선생이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짧은 기간에 40만명의 서명을 모은 데 충격을 받은 박정희 정권은 ‘긴조 1호’를 공표해 민간인 신분인 두 사람을 군사재판에 회부해 15년형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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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나의 한살매 46
‘개헌청원꺼리(운동)’를 내댄 지 오매 엿새가 되던 1973해 12달 30날 저녁, 서울 충무로엔 그야말로 눈이 펑펑 내렸다. 빈속은 더더욱 아실아실 하고. 이때 누가 우리 일매기(사무실-백범사상연구소)로 새뜸딴글(신문 호외)을 들고 뛰어들었다. “개헌꺼리 집어치우라, 안 그러면 일을 내겠다”는 박정희의 마구말(공갈)을 들락(문)짝만하게 박아 넣은 새뜸딴글. 내가 “우리 나가 봅시다.” “안 됩니다, 새뜸딴글이 눈발처럼 뿌려지고 있고 경찰과 사람을 잡아다 패 죽이는 중앙정보부가 빼곡히 깔려 으스스합니다.” “그러니까 나가자는 거지.” 하고 장준하 선생, 최혜성, 김도현, 김정남, 허술, 김영길, 김희로, 여럿이 나서는데 참말로 경찰과 개망나니들로 길바닥이 쫘악 깔려 있다. 눈은 펑펑 내리고 그날따라 굴대(방송) 소리는 왜 그리 잔망하게 들려오던지. “개헌꺼리 집어치우라. 안 그러면 가만 안 둔다”는 박정희의 마구내기(협박) 굴대를 밟으며 명동 한복판 찻집엘 들어가니 주인아주머니가 떤다. “아주머니, 떨 거 없어요. 차나 줘요.” 하고 영길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눈길이지만 우리 집엘 가서 돈 3만 원만 가져오게, 오늘만큼은 거저먹을 수가 없지 않은가.” 찻값을 낸 뒤 장호권(장 선생 큰아들)이가 숨겨두었던 차로 가로막는 것들을 그냥 받을 듯이 앞으로 몰아 왕십리 으슥한 밥집까지 갔다. 거기서 남은 돈에서 나 오천 원, 장 선생에게도 오천 원을 드리면서 “이제 다시 만날 때는 땅속일 거요, 이건 거기까지 갈 수레 값(저승 갈 돈)이고.” 하얀 눈 속에 1974해 새날이 밝고 그 닷새 뒤 우리는 박정희한테 불기(성명)를 띄웠다. “개헌청원꺼리는 어떤 마구말, 그 어떤 마구내기에도 꺼떡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 떠방(반응)으로 1달 8날,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나왔다. ‘유신 대들할(헌법)’을 고치자고 들고 나오거나, 이 ‘긴급조치’를 말로 건드려도 때살이(감옥) 15해라는 ‘긴급조치’.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줄임)/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네 손과/ 내 손에 남은 마지막/ 따뜻한 땀방울의 기억이/ 식을 때까지’ 김지하의 찰(시)이 나오던 바로 그 뒤안이었다. ‘긴급조치’가 나오고 닷새 뒤 새벽, 우리 안눌데(안방)는 구둣발에 짓밟히고 나는 개처럼 끌려가 닦달을 받게 되었다. 모질게 털고 짜고 비틀어도 나한테서 나온 것은 “‘긴급조치’ 어쩌고 하면 15해 때살이, 백기완이는 늙은이가 돼서 나오겠구나!” 그 한마디가 죽어야 할 사갈짓(죄)이란다. 나는 대들었다. “이봐, 일제 앞잡이가 되어 우리 독립군을 죽인 놈이 사갈놈(죄인)이지, 어째 ‘대들할(유신헌법)’을 바꾸자고 한 것이 사갈짓이냐.” 그냥 답쌔긴다(때린다). 한 댓새가 지났다. 가분재기(갑자기) 더욱 으스스해지더니 얼굴이 사뭇 커단 사람(문호철 검사·수사국 부국장)이 모눈을 가로 뜬다. “네가 떵이(천재)라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날더러 떵이라고? 어허, 그것은 아마도 술 거저먹는 떵이란 말일 거요.” “개수작 말고, 네가 찬굿(영화)도 잘 안다면서? 얼추(혹) <포도의 계절>이란 찬굿을 본 적 있어?” “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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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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