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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2.08 18:38 수정 : 2008.12.08 18:38

1975년 8월21일 장준하 선생의 장례식날, 필자(맨 오른쪽)가 경기도 광탄면 나사렛공원묘지로 올라가는 운구행렬을 이끌고 있다.

백기완-나의 한살매 47

1975해 2달 15날 한밤 영등포 교도소, 나는 안 나가겠다고 버텼다. 그런데 어거지로 끌어내 나오는데 그때까지 기다리던 기자가 묻는다.

“느낌이 어떻소.” “조그만 때속(감옥)에서 큰 때속으로 나오게 돼 더욱 주먹이 쥐어질 뿐이오.”(<동아일보> 보도)

“뭐? 조국 근대화가 잘 되고 있는 이 땅을 때속이라니, 괘씸한 놈.” 국무회의에서 내 톱살(욕)로 알라바치기 겨룸을 했다는 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문득 개고기 생각이 났다. 그놈의 뜨시끈뜨시끈한 마룩(국물)을 한술 마셔보고 죽어도 죽어야겠는데 그랬다.

하지만 한 모금도 못 했는데 또 잡아간다. (그해 4달 <동아일보>) 전라도엔 왜 끌고 갔는지 거기서 속이 뒤틀리고 오금이 왜드라져 죽게 되자, 지나는 짐차를 멈추더니 나를 태우고 달린다. 얼마쯤 가다가 시커먼 차로 옮긴 다음엔 눈과 입을 가린다. 붕~ 소리만 들렸다.

어딘가에서 나를 끌어낸다. 세걸(삼층)쯤이었다. 드나드는 들락(문)은 군대 눌비(침대)로 가로막고 바깥 들락은 담요로 가리고, 그런데 어라? 눌비 옆에 붙은 이름이 내가 아니다. ‘내가 백기완이가 아니라면 죽어도 딴 사람으로 죽는 게 아닌가.’ 아침돌이(순회)를 온 간호사의 손바닥에다 몰래 ‘백’이라고 썼다. 힐끗한다. 보름쯤 지났을까. 나를 지키던 중앙정보부 사람이 새뜸(신문) 한 장을 내 얼굴에 던진다. “인혁당 처단!” 들락짝만 한 글로 가득한 새뜸.

“봤어? 까불면 너도 이렇게 돼, 이 새끼야.” 또 며칠이 지났다. 끌고 나간다. 눈이 가려진 채 걸돌(층계)을 오르다가 얼굴이 깨졌다. 피가 철철. 보아하니 우리 집이다.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이참부터는 죽기 살기가 아니구나. 죽어서도 반드시 이기는 싸움이어야 한다. 따라서 ‘긴급조치 9호’만 깨뜨리고자 해선 안 된다. 박정희 막틀(독재)을 몰아 깨뜨리되 미국의 이 땅 거머쥐기, 그 응큼까지 앙짱 내리라 하고 일을 꾸리고 있었다.

8달 17날 늦은 한낮이었다. 장 선생 맏딸한테 따릉(전화)이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뭐야? 어떻게?”

“포천 어디서 ….”

옆집 새재약국에서 돈 만 원을 빌리고 우학명, 최혜성이 보태 빌린거(택시)를 탔다. 물어물어 달려가며 나는 속으로 ‘참말로 장 선생이 돌아가셨을까?’ 믿기질 않았다.

약사봉 골짜기에서 장 선생의 머리를 들다가 오른쪽 귀 옆에 날카로운 도끼 자국을 보고 나는 온몸을 떨었다. ‘네놈이 멱빼기(암살)했구나. 그것도 끔찍한 마구죽이기(학살).’

그때 장 선생의 나이 오매 쉰일곱. 나는 여섯 달 동안을 내리 울었다.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 메인/ 애달픈 하소 …’ 부르다간 울고 울다간 또 부르고.

장준하는 어떤 분이었을까. 내 목숨이 다하기 앞서 장준하에 마주해(대해) 꼭 남겨야 할 말이 있다.

백기완
첫째, 장준하는 돈, 다시 말해 모랏돈(독점자본)이 거머쥔 틀거리는 앙짱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둘째, 그렇게도 바라던 통일도 끊임없이 갈라놓고 있는 틀거리, 있는 이와 없는 이의 골을 없애는 것이라고 여겼다.

셋째, 우리의 통일은 검뿔빼골(제국주의)이 틀어쥔 온골(세계)을 뒤집는 첫걸음이라고 여겼다.

넷째, 여기서 우리의 통일은 우리 모두가 한나털(통일적)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몸소 사신 맨 처음의 어른이었다.

때문에 장준하의 머리에 도끼를 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빛나는 눈물처럼 받들어야 할 그런 분이었다. 그런 분을 누가 죽였을까. 한마디로 박정희 막틀의 멱빼기(암살)다. 아니 미국이 꾸민 멱빼기다. 따라서 장준하의 목숨을 뺏은 것은 8·15뒤 입때껏 그 숱한 멱빼기의 하나이면서 갈마(역사) 그 불림(진보)의 멱빼기(학살)라고 나는 잘라 말한다.

그러나 참말로 장준하는 죽었을까. 아니다, 1975해 끝머리쯤이었을 게다. 선생과 자주 가던 명동 술집을 찾으니 딴 데로 가고 없다. 옮긴 데를 겨우 찾아 장 선생과 늘 듣던 ‘대지의 항구’를 틀라고 했다. 이때 알범(주인) 아줌네가 술올리게(술상)를 와그그 밀어내고선 새 올리게를 차려놓고 날더러 ‘왜 혼자 왔느냐, 올라고 하면 밤나닥 둘이서 쑥덕이던 ‘통일’을 매고 오든지, 장 선생과 함께 오든지 그래야지. 아무튼 세 해 동안 쌓인 술값은 모두 거저다, 다시는 혼자 오질 말라’고 소리소리 치다가 ‘대지의 항구’를 부르며 울고 나도 울고. (1988해. <동아일보> 문화부장 이성주 글)

아줌네가 소릴 질렀다. “누가 장준하를 죽었다 하는가. 개수작이다. 장준하는 이렇게 살아 있다니까 ….” 통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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