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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8월21일 장준하 선생의 장례식날, 필자(맨 오른쪽)가 경기도 광탄면 나사렛공원묘지로 올라가는 운구행렬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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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나의 한살매 47
1975해 2달 15날 한밤 영등포 교도소, 나는 안 나가겠다고 버텼다. 그런데 어거지로 끌어내 나오는데 그때까지 기다리던 기자가 묻는다. “느낌이 어떻소.” “조그만 때속(감옥)에서 큰 때속으로 나오게 돼 더욱 주먹이 쥐어질 뿐이오.”(<동아일보> 보도) “뭐? 조국 근대화가 잘 되고 있는 이 땅을 때속이라니, 괘씸한 놈.” 국무회의에서 내 톱살(욕)로 알라바치기 겨룸을 했다는 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문득 개고기 생각이 났다. 그놈의 뜨시끈뜨시끈한 마룩(국물)을 한술 마셔보고 죽어도 죽어야겠는데 그랬다. 하지만 한 모금도 못 했는데 또 잡아간다. (그해 4달 <동아일보>) 전라도엔 왜 끌고 갔는지 거기서 속이 뒤틀리고 오금이 왜드라져 죽게 되자, 지나는 짐차를 멈추더니 나를 태우고 달린다. 얼마쯤 가다가 시커먼 차로 옮긴 다음엔 눈과 입을 가린다. 붕~ 소리만 들렸다. 어딘가에서 나를 끌어낸다. 세걸(삼층)쯤이었다. 드나드는 들락(문)은 군대 눌비(침대)로 가로막고 바깥 들락은 담요로 가리고, 그런데 어라? 눌비 옆에 붙은 이름이 내가 아니다. ‘내가 백기완이가 아니라면 죽어도 딴 사람으로 죽는 게 아닌가.’ 아침돌이(순회)를 온 간호사의 손바닥에다 몰래 ‘백’이라고 썼다. 힐끗한다. 보름쯤 지났을까. 나를 지키던 중앙정보부 사람이 새뜸(신문) 한 장을 내 얼굴에 던진다. “인혁당 처단!” 들락짝만 한 글로 가득한 새뜸. “봤어? 까불면 너도 이렇게 돼, 이 새끼야.” 또 며칠이 지났다. 끌고 나간다. 눈이 가려진 채 걸돌(층계)을 오르다가 얼굴이 깨졌다. 피가 철철. 보아하니 우리 집이다.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이참부터는 죽기 살기가 아니구나. 죽어서도 반드시 이기는 싸움이어야 한다. 따라서 ‘긴급조치 9호’만 깨뜨리고자 해선 안 된다. 박정희 막틀(독재)을 몰아 깨뜨리되 미국의 이 땅 거머쥐기, 그 응큼까지 앙짱 내리라 하고 일을 꾸리고 있었다. 8달 17날 늦은 한낮이었다. 장 선생 맏딸한테 따릉(전화)이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뭐야? 어떻게?” “포천 어디서 ….” 옆집 새재약국에서 돈 만 원을 빌리고 우학명, 최혜성이 보태 빌린거(택시)를 탔다. 물어물어 달려가며 나는 속으로 ‘참말로 장 선생이 돌아가셨을까?’ 믿기질 않았다. 약사봉 골짜기에서 장 선생의 머리를 들다가 오른쪽 귀 옆에 날카로운 도끼 자국을 보고 나는 온몸을 떨었다. ‘네놈이 멱빼기(암살)했구나. 그것도 끔찍한 마구죽이기(학살).’ 그때 장 선생의 나이 오매 쉰일곱. 나는 여섯 달 동안을 내리 울었다.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 메인/ 애달픈 하소 …’ 부르다간 울고 울다간 또 부르고. 장준하는 어떤 분이었을까. 내 목숨이 다하기 앞서 장준하에 마주해(대해) 꼭 남겨야 할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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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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