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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2.15 18:50 수정 : 2008.12.15 18:50

삽화 민정기 화백

백기완-나의 한살매 52

간밤엔 하얗게 주먹을 떨었다. 짐승 같은 것들한테 짐승보다도 못하게 짓밟히면서도 꼼짝도 못한 내가 안쓰러워 입술만 멍든 것이 아니었다. 내 뻗대(자존심), 내 한살매가 바사지는 것 같애 이빨도 뽀드득뽀드득 갈았다.

아닌 밤에 내 눌데(방)를 철커덩, 따고 들어온 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추운 밤 내 누더기 덮개를 홱 제끼더니 내 속옷도 홀랑 벗긴다.

“누구야, 이거?” 그래도 아무 말 없이 손불(전등)로 내 사타구니까지 살피며 저희들끼리 주절댄다. “이거 백기완이 맞어?” “글쎄 말이야, 그 떵떵 치던 백기완이 어딜 갔어, 꼭 곰 먹은 명태 같구먼.”

“야 이 새끼들아, 말 똑똑히 해. 너희들이 다 알가먹은 뼈다구다 왜, 곰탕으로라도 고아먹겠다 그거가.” 힘껏 내질렀으나 꺼떡도 않고 손불로 내 얼굴을 째려 비추더니 구둣발소리만 떡떡 치며 나간다. 아무래도 거들먹거리는데서 온 놈들임이 틀림없다. 아무리 떵떵거리는 놈들이기로서니 이렇게까지 날 짓밟는 그들은 사람인가, 짐승인가. 아니 내 목숨은 누구의 것인가. 내 것인가, 갸네들 것인가. 큰 흘떼(강)는 부대낄수록 말없이 흐르지만 꺾인 이의 한숨은 마냥 시물댄다고, 잠이 올 턱이 없었다.

아침이 가고 낮끼(점심)도 끝난 고요를 가르며 식은 강냉이죽 꺼지는 듯한 서글픈 노래가 들려온다. 콧날이 시큰했다. 밥 나르는 도둑놈 빨대녀석의 소리라, 불렀다.

“야 빨대야, 너, 거 무슨 노래가?” “‘녹슬은 기찻길’ 나훈아 노래요.”

“나훈아가 누구가?” “나훈아도 모르면서 때(감옥)엘 들어왔어요?”

“아무튼 너, 그거 한술 더 불러줄래.” “싫어요, 누가 부르라고 하면 노래가 안 나와요.”


그 말에 나는 귀가 솔깃, “그래, 난 그저 듣기만 할 테니까!”

그제서야 또 부르는데 숨이 막혔다. 눈물로 뚫었다.

‘대동강 한강물은/ 서해에서 만나/ 남과 북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전해다오 전해다오/ 고향 잃은 서러움을/ 녹슬은 기찻길아/ 너처럼 이 마음도/ 울고 있단다.’

“아저씨 울어요? 우시는 걸 보니 큰일은 못하시겠네요.” “큰일은커녕 작은 일도 못할 꼴새다. 그러나저러나 너, 이참 나가면 뭘 할래?” “이참에야말로 한탕 쳐야지요!”

“빼대기(강도)짓 말이냐?” “말이 왜 그렇게 쌍스러워요, 한탕이지. 근데 아저씬 이참 나가시면 뭘 하실래요? 또다시 종이조박에 적힌 글이나 읽다가 들어오실 거예요. 안 돼요, 가진것들이란 그냥 달라고 하면 땡닢 하나 안 내놓는 겁니다. 그냥 들이대야지.”

“뭘 들이대 인석아!” “칼이지요!”

“칼이라니? 그래봤자 그건 너 혼자만 잘살겠다는 거야, 인석아!” “아저씬 ‘울보’라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군요. 모두가 내건 내거라고 꽁꽁 잠그는데 그럼 어떡해요!”

“이봐, 모두가 잘사는 거 ‘노나메기’를 해야지!” “노나메기라니요?”

“그건 너도나도 일을 하고 그리하여 너도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벗나래(세상)를 만들자, 그 말이야!” “그런 벗나래가 어디 있어요!”

백기완
“없으니까 만들자는 거지!” “뭘 가지고요, 있는 것들이 내놓는 답니까?”

“어허, 너 배고프면 먹어야지, 그와 똑같애.” “노래 한 줄에 우시는 분이 이 됫싼 어려움들을 어떻게 참어내고 만들어요!”

“야, 이놈아!” 그러는데 팔이 비틀려 끌려가더니 영 안 나타난다. 기다려도 아니 오는 님을 그리는 저님(연인)처럼 맨잠이 스르르르.

의무과장 같았다. “빨리 손을 안 쓰면 어렵겠군. 사람 하나 죽이겠어.” 그러면서 돌아설 때 나는 “과장님! 다부(부탁)가 하나 있습니다. 나한테 죽을 갖다 주던 녀석을 만나게 해 줄 순 없을까요? 그 녀석한테 노래 하나를 배웠으니 나도 내 찰(시) 한귀만 들려주고 싶어 그러는 겁니다.” “그 찰이라는 게 뭐요?”

“내 머리 위 멍청(천정)에 새겨져 있는데요.” “안 보이는데?”

“한술 읽어드릴까요?”

“내가 만약 여기서 죽어/ 한줌 거름으로 눈을 감는다 해도/ 나는 아물레(절대) 그냥은 못 썩는다/ 네놈을 앙짱 내는 주먹의 나무를 키울 테다/…/ 벗이여/ 내가 썩어 키운 주먹의 나무엔/ 이런 글귀를 달아다오/ 항구 찾아 끝없이 가는 전사들만 쉬어가시라/….”

“어허, 댓님(당신)은 썅이로구(도대체) 누구요? 고칠데(병원)로 내보내 달라고 할 줄 알았더니 제 이야긴 않고 사람한테 사람 이야기나 알려 달라는군!”

그 빨대 녀석 아직 살아나 있을까? 물을 길 없구나. 통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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