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민정기 화백
|
백기완-나의 한살매 52
간밤엔 하얗게 주먹을 떨었다. 짐승 같은 것들한테 짐승보다도 못하게 짓밟히면서도 꼼짝도 못한 내가 안쓰러워 입술만 멍든 것이 아니었다. 내 뻗대(자존심), 내 한살매가 바사지는 것 같애 이빨도 뽀드득뽀드득 갈았다. 아닌 밤에 내 눌데(방)를 철커덩, 따고 들어온 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추운 밤 내 누더기 덮개를 홱 제끼더니 내 속옷도 홀랑 벗긴다. “누구야, 이거?” 그래도 아무 말 없이 손불(전등)로 내 사타구니까지 살피며 저희들끼리 주절댄다. “이거 백기완이 맞어?” “글쎄 말이야, 그 떵떵 치던 백기완이 어딜 갔어, 꼭 곰 먹은 명태 같구먼.” “야 이 새끼들아, 말 똑똑히 해. 너희들이 다 알가먹은 뼈다구다 왜, 곰탕으로라도 고아먹겠다 그거가.” 힘껏 내질렀으나 꺼떡도 않고 손불로 내 얼굴을 째려 비추더니 구둣발소리만 떡떡 치며 나간다. 아무래도 거들먹거리는데서 온 놈들임이 틀림없다. 아무리 떵떵거리는 놈들이기로서니 이렇게까지 날 짓밟는 그들은 사람인가, 짐승인가. 아니 내 목숨은 누구의 것인가. 내 것인가, 갸네들 것인가. 큰 흘떼(강)는 부대낄수록 말없이 흐르지만 꺾인 이의 한숨은 마냥 시물댄다고, 잠이 올 턱이 없었다. 아침이 가고 낮끼(점심)도 끝난 고요를 가르며 식은 강냉이죽 꺼지는 듯한 서글픈 노래가 들려온다. 콧날이 시큰했다. 밥 나르는 도둑놈 빨대녀석의 소리라, 불렀다. “야 빨대야, 너, 거 무슨 노래가?” “‘녹슬은 기찻길’ 나훈아 노래요.” “나훈아가 누구가?” “나훈아도 모르면서 때(감옥)엘 들어왔어요?” “아무튼 너, 그거 한술 더 불러줄래.” “싫어요, 누가 부르라고 하면 노래가 안 나와요.”그 말에 나는 귀가 솔깃, “그래, 난 그저 듣기만 할 테니까!” 그제서야 또 부르는데 숨이 막혔다. 눈물로 뚫었다. ‘대동강 한강물은/ 서해에서 만나/ 남과 북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전해다오 전해다오/ 고향 잃은 서러움을/ 녹슬은 기찻길아/ 너처럼 이 마음도/ 울고 있단다.’ “아저씨 울어요? 우시는 걸 보니 큰일은 못하시겠네요.” “큰일은커녕 작은 일도 못할 꼴새다. 그러나저러나 너, 이참 나가면 뭘 할래?” “이참에야말로 한탕 쳐야지요!” “빼대기(강도)짓 말이냐?” “말이 왜 그렇게 쌍스러워요, 한탕이지. 근데 아저씬 이참 나가시면 뭘 하실래요? 또다시 종이조박에 적힌 글이나 읽다가 들어오실 거예요. 안 돼요, 가진것들이란 그냥 달라고 하면 땡닢 하나 안 내놓는 겁니다. 그냥 들이대야지.” “뭘 들이대 인석아!” “칼이지요!” “칼이라니? 그래봤자 그건 너 혼자만 잘살겠다는 거야, 인석아!” “아저씬 ‘울보’라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군요. 모두가 내건 내거라고 꽁꽁 잠그는데 그럼 어떡해요!” “이봐, 모두가 잘사는 거 ‘노나메기’를 해야지!” “노나메기라니요?” “그건 너도나도 일을 하고 그리하여 너도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벗나래(세상)를 만들자, 그 말이야!” “그런 벗나래가 어디 있어요!”
![]() |
백기완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