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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2.17 18:38 수정 : 2008.12.17 18:38

1980년 전두환 쿠데타 세력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한 채 풀려나 앓아누운 필자의 치료비를 마련하고자 후배·지인들이 나서서 펴낸 시집 <젊은 날>의 표지. 옥중에서 쓴 시를 모은 백기완의 첫 시집으로, 운동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가 된 ‘묏비나리’ 등이 실렸다.

백기완-나의 한살메 54

한양대학 고칠데에서 석 달 만에 나왔다. 서대문 때(감옥)의 의무과장 윤호영 꿰찬(박사)의 도움과 한양대 김광일 꿰찬의 보살핌이 없었으면 나는 고칠데 옆에도 못 가보고 죽었을 것이다.

그 도막에 나라 안팎에서 많은 뜨거움을 보내주었다. 뭉쿨하는 새름(정)도 보내주고, 꼬불친 돈도 보내주고, 백술을 굽혀도 모자랄 만했다. 하지만 고맙다고 고개 숙일 짬이 없었다.

다시 온몸이 들꼬였다. 고칠데엘 또 들어가 무릎에서 썩은 고름을 빼고 뻗정다리로 한 달을 누웠다가 나오니 부끄러웠다. 아프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깜치(정보원)들은 바싹 따라붙고, 잠은 안 오고 그럴 때다. 밤늦게 글난이 이문구가 술 한 땅지를 들고 찾아왔다. 내 꼴이 안됐던지 벌컥벌컥 혼자 들이키며 묻는다.

“거, 나간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몸에 금이 간 이다 그 말이지. 사람을 묶어놓고 치고, 달아놓고 치고, 그리하여 녹초가 되면 골 빼먹고 알 빼먹고 뼈다구까지 울궈먹으면 온몸이 나가질 않겠소. 그러나 피맺힌 부아, ‘안간’ 만큼은 펄펄 살아있는 이를 이르는 말이지요.”

“그 나간이 나라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런 나라가 있을까요?”

“바로 이땅 우리나라 아니오, 몽땅 나간이를 만드는 나라!”

“그렇군요, 그 나간이를 가지고 글나(소설)를 하나 꾸리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되다니, 이문구 같은 글쟁이가 손을 대면 나간이가 참짜로 살아날 겁니다.”

몇 날 있다가 또 찾아왔으나 그날도 내 몸이 안 좋은 걸 보고 “선생님이 바로 나간이이신데” 하고 돌아간 뒤 내 몸은 또다시 뒤틀렸다.

고칠데를 가려고 퇴계로 6가 집을 나섰다. 눈이 펑펑 내려 빌린거(택시)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때 삐익~ 하더니 비싼 수레(차) 하나가 바로 내 앞에서 멎는다. 보아하니 옛날 벗이다. 너무나 반가워 “야, 너!” 그러려는데 모르는 체 커단 집으로 들어간다. ‘그 녀석이 아니던가?’ 한 스물조금(이십분) 뒤다. 그때까지 수레를 못 잡고 있는데 그 녀석이 그 큰집에서 나온다. “야 나야, 백기완이!” 그랬는데도 못들은 체 그 비싼 수레를 타고 내뺀다.

그러고도 한참 만에야 빌린거를 타고 고칠데를 다녀와서 내가 숨을 고르고 있는 양평(김오일네 동네) 낡은 잿집(기와집)으로 갔다.

아내의 말이었다. “여보, 댓님 무척 점잖아지셨나 봐요. 딴 때 같았으면 그 사람 그냥 놔두었겠어요, 앙짱을 냈지.” 나는 아무 맞대를 안 했다. 밖에선 눈보라 소리인지 짐승의 소리인지 으스스, 마침 머리맡에 있는 글묵(책)을 집으니 러시아 찰니(체르니쉐프스키)의 이야기다.

‘짜르’ 막틀(독재)에 맞서다가 잡혀가 꿀밑(영하) 마흔골(40도)의 때속(감옥)에서 열 해. 하지만 가만히 있질 않었다. 밤새 무언가를 썼다간 새벽녘엔 불동이(난로)에 넣었다고 한다. 또다른 때로 옮겼다. 그곳 추위도 꿀밑 마흔골, 거기서도 밤새 뭔가를 썼다간 새벽녘에 불동이에 넣고. 다시 옮긴 때도 추위가 꿀밑 마흔골이 넘는 곳, 거기서 또 일곱 해, 모두 스물일곱 해나 때를 살다가 거의 죽게 되자 ‘짜르’가 그를 내준다.

백기완
그러나 이미 힘이 다해 때에서 나와 한두 달 만에 죽으니 ‘맑스’가 말했다고 한다. ‘러시아 으뜸의 불쌈찰니(혁명시인)’라고. 몇 날을 눈만 껌뻑이다가 그 찰니한테 글월을 쓰기 차름(시작)했다.

“여보시오, 그대가 밤새 썼다간 불동이에 넣고, 또 썼다간 또 불동이에 넣기를 스물일곱 해, 그것들을 모두 불을 지른 까닭이 뭐요? 거기도 이땅의 전두환이 같은 던적(병균)이 있수? 거기도 사람 잡는 개망나니가 있고 등빼기(배신)가 있고 깜떼(절망)라는 게 있소. 그대의 사랑은 어떤 것이었소?”

돈을 얻으러 갔던 최열과 이호웅이 눈을 하얗게 쓰고 왔다. 한낮엔 전채린 교수가 공주사대 ‘황토굿패’와 몰려와 하는 말이었다. “때속에서 쓴 찰로 찰묵을 꾸리겠습니다. 그것을 팔아갖고 고칠데돈을 보태야 합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벌써 다 태워버렸소. 하지만 이참 내가 러시아 어느 찰니한테 글월을 쓰고 있는데 그것을 모아 글묵(책)을 내지요. 아니라고 버텨 <젊은 날>이라는 나의 첫 찰묵(시집)을 내게 됐다. 전채린 교수가 대뜸 칠백 묵(권)을 팔고 김찬국 교수가 미국까지 가지고가 팔고. 하지만 나는 러시아에 띄울 글월을 내리 써나갔다. 아내가 큰 덤줄기 같은 글이라고 했는데 누가 몰래 가져가 아직도 안 돌려주고 있다. 누구냐, 다시 돌려줄 수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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