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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민정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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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나의 한살매 55
1982해 봄이던가. 나는 다시 나섰다. 기독교 예장 젊은이들이 모이는 대구엘 내려갔다. 커단 교회에 들어서자 여러 천의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일어서며 노래를 불러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산자여 따르라” 노래로는 처음 듣는 거라. 온몸의 솜털이 쭈빗, 그날 내 이야기는 딴 거이 아니었다. “우리는 죽어서도 죽질 않고 일어서는 ‘멍석말이’라는 먼말(신화)을 갖고 있는 겨레다. 나도 그 먼말에 따라 죽었다 살아났노라”고 하니 한 가시나가 저도 그 우리네 먼말로 오늘의 어려움을 뚫겠다고 발을 동동. 뿌듯해 돌아오니 경찰과 깜치(정보기관원)들이 발칵 뒤집혔다. “댓님(당신)은 여러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부터가 사갈짓(죄)”이라는 경찰들과 싸우다가 벌써 다쳤던 탈이 다시 도져 고칠데(병원)엘 또 들어갔다. 한 달 만에야 겨우 나왔다. 대전에 모인 수녀들한테도 ‘멍석말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예부터 일꾼들이 일에 치여 죽으면 무덤을 아니 썼다. 썩은 멍석에 둘둘 말아 덤(산)고랑에 갖다 버렸다. 이른바 ‘멍석말이’다. 그리되면 배알은 여우가 뜯어가고 팔다리는 들개가 뜯어가고 나머지 살 꼭짓(점)들은 말똥가리가 뜯어가 덜렁 남은 뼈다귀, 새벽녘 추위가 더 매서워 꿀밑(영하) 서른길(30도)에 가까우면 참나무가 얼어터진다. ‘쩡쩡’, 뼈다구로 보면 그 소리는 죽은 이한테 다시 내려치는 매질소리로 들리는 거라. 얼마나 약이 오르겠는가. 그래서 그 참나무 얼어터지는 소리, 떵딱(장단)에 따라 일어난다. 마침내 고얀놈들의 몽뎅이를 빼앗아 앙짱을 내버리고는 일꾼들이 바라는 벗나래(세상) 노나메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느 수녀의 말이었다. “선생님, 그 이야기를 벌써 들려주셨더라면 제 생각이 사뭇 달라졌을 거”라고 하는 소리에 힘이 나 서울역에 내리니 모를 녀석들이 윽박지른다. “네놈이 전두환 각하를 헐뜯었다”고 한참을 다투다가 탈이 도져 또 고칠데에 한 달을 눕게 되었다. 1983해 가을이었다. 이런 집안 꼴을 보다 못한 우리 딸들도 일어섰다. 큰딸은 대학선생(강사)을 때려치우고 일꾼꺼리(노동운동)에 뛰어들고 둘째딸은 저네 학교에서 전두환이 때려잡자고 외친 듯했다.한밤에 청량리 경찰서라며 말통(전화)이 왔다. “서울여대에 다니는 백미담이네 집 맞느냐?” 그렇다고 했더니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면 와 보란다. 득달같이 달려갔더니 우리 딸이 가둠(유치장)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야, 너 왜 그래?” 그러면서 찬찬히 보니 목덜미가 찢졌다. 옳거니, 그 헌디(상채기)를 감추느라 그랬구나. 똑뜨름(역시) 애비란 애들한텐 사뭇 개긴다고 눈시울이 ‘뜨끈’. 가름날(재판날)이 왔다. 돈을 안 받을뿐더러 여러 사람의 낮끼(점심)까지 사는 박찬종 말네(변호사)가 이화여대에 다니는 새내기 딸을 데리고 왔다. 언니들이 싸우는 걸 보고 배우라고. 박 말네가 묻는 것이었다. “배우내들이 나선 것은 정치적 자유 민주주의를 살리자, 그것이지요?” “네, 참된 민주주의를 살리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빼앗긴 대로(자유)를 살리자 그 말 아니오?” “네, 참된 대로를 찾자는 겁니다. 따라서 이참 이 자리에 설 사갈놈(죄인)은 전두환입니다. 가름네(재판장)님, 전두환이를 끌어와야 합니다.” 막대(검사)가 벌떡 일어나며 “뭐야, 저년 끌어내.” 이러구 저러구가 있을까. 김인경이와 우리 딸애의 팔과 머리채를 잡아끌어내고 배우내들은 모래주머니를 던지며 대로를 외치고, 가름마루(재판정)가 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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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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