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6년 7월19일 ‘권양 성고문 진상 폭로대회’ 장소인 명동성당 일대를 전경들이 원천봉쇄하고 있는 가운데 면사포를 쓴 신부가 간신히 검문을 통과하고 있다. 그해 <보도사진연감>에 실린 이 사진의 설명에는 단지 ‘집회’라고만 적혀 있을뿐 ‘성고문 사건’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
백기완-나의 한살매 57
1986해 7달 어느 날, 비가 엄청 왔다. 그런데도 우리 골목은 수레(자동차) 일곱이 가로막고 날 못 나가게 한다. 둘은 내 큰딸을 잡자는 것이고, 다섯은 하제 있을 ‘권양 성고문 진상 폭로대회’에 내가 함께굴낯(공동대표)이라 그러는 거였다. 안 그래도 나는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제주대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새내기 맞이잔치’ 그러자고 하고 올라오는데 무릎이 욱씰욱씰 고칠데에 누웠었고, 또 어딘가에선 ‘아크로폴리스 광장’이 아니라 ‘새뚝이 마당’ 그러자고 하다가 쓰러져 한 달을 누웠다 나온 뒤라, 마냥 낑낑대는데 깊은 밤 아내가 녀석들이 수레 속에서 잠이 들었다고 한다. 이때다 하고 빗속의 덤(산)을 넘어 흙투성이인 채 빌린거(택시)를 타고 열림마당(대회장)인 ‘명동성당’으로 갔다. 신부·수녀 몇이 날 보더니 굴낯(대표) 한 분이 오셨다고 반긴다. 날이 밝았다. 성당 이쪽저쪽으로 십만도 더 모여 들었으나 경찰에 막혀 못 들어온다. 나 혼자서 ‘여는 말’과 ‘마무리 말’로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고 세 술(번) 크게 외치고는 수녀원 어디에 며칠 숨었다가 냅다 달아났다. 박종태, 나종학, 송일영네 집에 숨었다. 속이 터졌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어느 낚시터에서 한 이틀 묵고 오는데 그 집 꼬마가 “할아버지 빠이빠이” 그런다. 나는 발길을 돌려 “얘야, 빠이빠이가 아니라 잘잘”(잘 있어요, 잘 가세요) 그래야 한다며 한숨지었는데, 아! 그 꼬마는 이참 그 말을 쓰고 있을까? 어느 날 저녁, 마룻길에서 낑낑대는 손수레를 밀어주었더니 고맙다고 쐬주를 사며 하는 말, “넝감, 내 밀게나 하는 게 어때? 술은 살 테니 ….” “그러지요” 하고 또 밀어주고 나서 한 모금 하는데 날더러 “무얼 하다 그래 되었느냔다.” 나는 술낌에 “나 말이오? 통일 꺼리(운동) 하는 사람이오” 그랬다. 그런데 갑자기 “언니!” 그러면서 엎드려 낑겨 달란다. 만주에서 8·15 뒤 라비(고향)를 찾아오다가 언애(동생)는 총에 죽고, 저는 다리를 못 쓰지만 언니를 따라 통일을 해 만주엘 가겠다고 운다. 함께 울다가 나는 그만 탈이 도졌다. 양 수녀, 윤 수녀의 도움으로 왜관 ‘파티마 요양원’에 ‘김아모스’로 숨어있던 어느 날, 박 원장 수녀님이 말통(전화)을 걸어왔다.“백 선생님, 밖을 좀 내다보세요.” 슬며시 내다보니 그럴 수가? 마치 찬굿(영화) ‘불쌈꾼(혁명아) 사파타’의 마지막처럼 백도 더 되는 경찰들이 덤자락을 뺑 둘러치고 나한테 총을 겨누고 있다. 꼼짝없이 잡혀가는데 그때 시름 짓던 그 원장 수녀님은 어떻게 됐을까? 뻗난길(고속도로)을 쑤악 달렸다. 오줌이 마렵다고 했다. 참으란다. 그대로 싸겠다고 하니 묶인 채로 멎는데(휴게소)에 내려준다. 바글바글에 낑겨 오줌은 누었으나 올릴 수가 없어 아질(안타까워)하는데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쯔쯔쯔.” 내 바지를 올려주던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막대(검찰)의 닦달도 누워서 받을 때다. “선생님, 힘을 내세요”라고 하다가 막대에 가로막히던 그 씩씩한 대학생은 이참 무엇을 하고 있을고 …. 탈(병)이 깊은 나를 집어넣기가 무엇했던지 한참을 쳐다보다가 어딘가에서 말통을 받고서야 때(감옥)에 처넣던 그 막대는 이참 무엇을 하고 있을까?
![]() |
백기완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