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7월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 행렬이 시청을 향해 연세대 정문 앞을 출발하고 있다. 최병수 작가의 걸개 그림 뒤쪽으로 흰 바지저고리 차림에 지팡이를 짚은 필자를 비롯해 고은 시인, 계훈제 선생, 문익환 목사, 송건호 선생이 보이고, 그 뒷줄에 김영삼·김대중 선생도 따르고 있다.
|
백기완-나의 한살매 58
1987해, 서울대 박종철 배우내(학생)가 맞아죽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내가 죽어야 할 것을 네가 먼저 …, 하지만 종철아, 너의 죽음은 마침내 쌈불(바닷속 화산)이 되어 발칵 뒤집을 거’라고 했다. 나도 그 쌈불이 되어야 한다며 그해 6달, 때(감옥)에서 나오자 곧바로 지팡이를 짚고 거리에 나섰다. 덕수궁 옆엔 숨을 못 쉬게시리 최루탄이 펑펑, 나는 그 한가운데 서서 “이제 전두환의 마지막 목두가지는 우리가 비틀자”고 외쳤다. 사과탄이 나를 겨냥해 펑펑, 백도 더 터져 내 사타구니까지 범벅이 되자, 찻집 아줌네가 물을 떠다주기도 했다. 또다시 연세대 이한열 배우내가 쓰러졌다. 최병수가 그린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그림을 따라다니며 나는 한없이 울었다. 최루탄 때문이 아니었다. 깃발이 보이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긴다는 깃발.’ 그 깃발을 들고 이한열 뜨끔(열사) 땅술접네(장례식)를 마련하던 밤이다. 훠이훠이 누가 걸어온다. 때에서 나오는 문익환 목사가 아닌가. 나는 반갑게 나무 밑에 앉히며 “넝감, 내말 한술 들어보겠수? 우리는 이제 때참(기회)을 잡았수. 그것도 천해 만에. 동학싸움 때 삼십만이 죽었지만 이룩하진 못했고, 여러 백만이 죽어가면서 일제를 꼬꾸라뜨렸지만 마저 이룩하진 못했고, 날래한나(해방통일) 싸움도 거셌으나 아직 일구질 못했고. 그러나 이제 때참이 온 겁니다. 다만 이참 뽑기(선거)에서만큼은 내가 대통령 하겠다고 갈라서면 안 됩니다. 또 그들 가운데 누구를 밀겠다고 갈라서도 안 됩니다. 더구나 뽑기로 뭐이 될 줄 알아서도 안 되지만, 뽑기를 하드래도 내 사람을 뽑겠다고 랭이(민중)들까지 알기(중심)를 못 세우면 큰일이니, 넝감이 앞장서 바로 옆에 있는 계훈제 선생과 나, 그리고 문 목사를 하나로 묶도록 하세요.” 날이 밝았다. 이한열 뜨끔의 땅술접네엔 이백만도 더 모였다. 그것으로 우리가 이긴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모인 시청앞엔 타다탕, 최루탄이 터졌다. 왜 그랬을까? 전두환의 뒤집기였다. 이제부터 모든 것을 뽑기로 내몰겠다는 응큼한 뒤집기. 아니나 다를까. 이백만도 더 모인 그날, 새뜸(신문)들은 모두 그 이백만의 아우내는 밑으로 내리고, 새뜸 머리엔 “김대중 사면복권” 하고 올리고, 그 옆에 아주 작게 “백기완이도 풀렸음” 그랬다. 나는 섬짓하여 문 목사한테 말했다. “내가 대통령하겠다는 건 나쁜 게 아니나 이참에 서로 하겠다는 건 곧 갈라서기라. 그렇게 되면 우린 다 죽습니다. 군사 막틀(독재) 끝장과 사람 죽인 개망나니는 쓸어 팡개친다는 한뜻으로 뭉쳐 뽑기를 치루어 천해 만에 온 때참을 반드시 살려야 합니다.”“좋다”고 헤어지고 나서 그해 10달, 갈마(역사)의 쌈불은 우당탕 터지는데 사람들은 누구를 내세운다는 생각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문 목사는 누구를 뽑아야 한다고 하고, 계훈제 선생은 아니다, 대통령 하겠다는 사람을 하나로 하자고 하고, 나는 랭이(민중)들이 나서 둘을 어떻게든 하나로 묶어야 한다 하고. 그러나 하나가 안 되자, 그래도 천해 만에 온 때참을 살리는 조리(방법)로 날더러 랭이소래(민중후보)로 나서라고 했다. 아니다, 그건 딴 사람이 나서야 한다고 했지만 갈마가 곤두박질칠 때 가만히 있는 거야말로 사갈짓(죄)이라는 바람에 내가 나서며 들고나온 것이 ‘민중후보 연립정부안’이었다.
![]() |
백기완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