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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2.24 18:04 수정 : 2008.12.24 18:04

1989년 2월4일 오전 종로5가 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계훈제 선생, 필자, 문익환 목사가 북한 김일성 주석이 새해 첫날 제안한 남북정치협상에 참석하고자 방북할 뜻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백기완-나의 한살매 59

1989해 새해 하룻날, 새해맞이로 찾아온 사람들로 벅적이는데 누군가에게서 말통이 따르릉.

“굴대(방송) 들었어요?” “무슨 굴대, 못 들었는데?”

“노녘(북쪽) 김일성 주석이 마녘(남쪽) 일곱 사람한테 ‘남북 정치협상’을 들고 나왔어요. 거기엔 노태우·김종필·김영삼·김대중·문익환·김수환과 함께 백 선생 이름도 있어요.”

나는 그 자리에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문 목사한테 말통을 넣었다. 뜻밖에도 목사님은 안 가겠단다. “돈 많은 정주영이가 먼저 왔다 갔다 해서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 수 없이 나 혼자 적네(기자)들을 불러 내 뜻을 말하고 나오는데 문 목사가 같이 가겠다고 왔다. 굴대의 찍거(촬영기)를 다시 찍었다. 그 자리엔 계훈제·송건호·송월주·신경림 선생이 함께했다.

나는 문 목사더러 “이제는 가는 길이 뜸꺼리(문제)다. 이랬으면 어떨까요? 큰 고을마다 다니며 사람들을 모아놓고 우리가 왜 노녘엘 가려고 하느냐. 가면은 무슨 말을 했으면 좋겠는지를 물읍시다. 한 오백만쯤 안 나오겠습니까. 그렇게 여럿이 풀어가야 합니다. 목사님은 무슨 말을 주고받고 싶다고 할 겁니까?”

나는 먼저 이땅을 갈라놓은 모든 틀거리를 없애자고 하고, 이런 이야기도 하고 싶다고 했다.

첫째, 우리 겨레의 어먹한(위대한) 섯빨(기상), 그것은 ‘저치’ 가는 거라는 말을 하고 싶다. ‘저치’란 무엇이드냐. 이 땅별(지구)을 손바닥에 올려놓을 때까지 한없이 가는 널마(대륙)의 마음이다. 다시 말해 가고 또 가면서 이건 내거다 하고 깃발이나 꽂고, 울타리나 치고, 빼발(국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심으러 가는 거다. 그 패박(상징)으로 진달래와 밤나무, 그리고 은행나무를 심으면서 가는 거다. 진달래란 무엇이냐. 사랑의 불길. 또 밤나무는 이웃과 함께하는 새름(정)이요, 은행나무는 천해만해(천년만년) 가는 아주마루(영원)의 패박이니 그것을 심으며 가는 ‘저치’가 우리 겨레의 섯빨이라는 걸 말하고 싶다.


둘째, 이땅 모든 이들이 우러르는 빼난이(전형성)는 누구일까. ‘버선발’이다. 죽어도 한 뼘 땅이라도 가져보고 죽고 싶다는 사람들의 목마름에 쏠려 저녘바다(서해)를 땅으로 만든 ‘버선발’은, 땅을 갖고 싶은 이들은 누구나 흰두루(백두산)에서 한라까지 아무것도 안 들고 한 줄로 서라. 이때 ‘떵’ 하고 북이 울릴 것이면 달려가 마음껏 땅을 가지라고 했다. 맺힌 살(죽음)을 한없이 풀자 그 말이다.

하지만 힘있는 놈이 그 너른 땅에 울도 치고 나라까지 만드는 바람에 어린 것의 머리가 하얘지도록 땅 한 뙈기를 못 가지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쉬고 또 쉬고. 그러자 그 한숨이 눈이 되어 천해만해 내리니 어떻게 됐을까. 울도 나라도 집도 사람도 몽땅 눈속에 파묻히는 걸 보고 이참도 울고 있는 ‘버선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백기완
셋째, 우리 겨레의 알짜인 랭이(민중)의 하제(희망)를 말하고 싶으다. 그게 뭐드냐. ‘노나메기’다. 사람이 살다보면 아름다운 숲은 논밭이 되고, 마을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람 사는 마을은 치사한 것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돈만 보면 먹어대는 ‘납쇠’, 먹어도 먹어도 속이 좁아지는 ‘쫄망쇠’, 샘보다 맑은 눈물만 뼉치는(짓밟는) ‘뼉쇠’가 거머쥐니 그것을 없애야 한다. 그리고는 너도나도 일을 하고 그리하여 너도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벗나래(세상), ‘노나메기’를 만드는 것이 우리네의 하제라는 거.

그런데 요즈음 우리들이 사는 이땅은 이참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돈만 아는 돈 버러지 ‘납쇠’가 날뛰고 있고, 집도 먹고, 땅도 먹고, 풀도 먹고, 나무도 먹고, 덤(산)과 들도 먹고, 닥치는 대로 먹어대지만 소갈머리는 더없이 좁아지는 ‘쫄망쇠’가 몽땅 거머쥐고 있다. 그뿐인가. ‘뼉쇠’는 사람의 맑은 눈물만 뼉치는 게 아니다. 옳음을 뼉치고, 아름다움을 뼉치고, 거룩함을 뼉쳐 사람과 이 누룸(자연)까지 쌔코라뜨리고(망치고) 있다.

이래가지곤 안 된다. 여기에 맞서 사람과 누룸의 값어치를 바로 세울 하제를 내대야 하는데 그게 뭣이냔 말이다. 나는 그것이 ‘노나메기’라고 외치고 싶다고 했으나 뜻 같질 않았다.

‘남북 정치협상회의’를 함께 열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 모임에 가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거라고 말할 모임도 갖기가 힘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나와 함께 애를 쓰던 김영규 교수, 임진택·천영초·홍선웅이한테까지 부끄러웠지만 나는 요즈음도 그때 못한 말을 마구 내대고 싶어 온몸이 떨리고 있음을 숨기고 싶질 않다. 통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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