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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2.29 21:30 수정 : 2008.12.29 21:30

섣달그믐 “돌빔 하러 왔다” 삽화 민정기 화백

백기완-나의 한살매 62

섣달그믐만 되면 이땅엔 함박눈이 마냥 펑펑 내렸다. 콜클(소나무가지) 불빛 밑에서 헌옷을 꿰매고 있는 어머니 옆에서 ‘돌빔’이 칭얼대는 것이었다.

“엄마, 우리는 왜 ‘설빔’을 안 해? 때때옷도 하고, 떡도 좀 해야지.”

“네 애비가 곧 와, 그게 우리에겐 ‘설빔’이야.”

“지난해에도 안 오셨잖아.”

“꾹꾹 기다려봐. 졸면 안 오셔, 네 눈썹도 희어지고.”

그 말에 끔찔한 ‘돌빔’은 꼬박껏 기다리다가 깜빡 조는데 밖에 나가셨던 어머니의 큰소리가 들렸다.

“돌빔아, 이것 보거라. 누가 갖다놓았을까?” 그러면서 ‘부심이’ 한 벌을 내려놓으신다. ‘부심이’란 옷이다. 계집애 것은 풀빛 치마에 빨강 고름의 빛동(색동)저고리. 그리고 사내애 것은 풀빛 바지에 빨강 대님, 그리고 빨강 저고리에 풀빛 고름. 이놈을 입고 나서면 제 아무리 꽁꽁 얼붙은 눈길이래도 봄이 싹트는 거라, 그래서 애들이 가장 좋아하는 옷이라고 해 온다.

가난뱅이 ‘돌빔’한테 그런 ‘부심이’가 왔더라는 이야기는 여기저기 번져버렸다. 어째서 ‘돌빔’이한테 그런 ‘부심이’가 왔더란 말이드냐. 갸는 워낙 마음이 착하고 생각이 늘 따뜻해 그랬다고 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도 배가 고파도 도통 울지를 않고 참고 견디었다. 그런 ‘돌빔’이한테 갑자기 ‘부심이’가 오자 사람들은 그때부터 ‘설빔’이라 하질 않고 ‘돌빔’ 그러면서 섣달그믐이 오면 착한 마음으로 깨끼(선물)를 기다렸겠다.


하지만 저 깊은 흰두루(백두산)에 혼자 사는 열한 살 ‘도랑네’에겐 그런 말은 한낱 뜬구름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 한 살 적부터 아버지와 둘이서만 살다가 다섯 살 되던 해, 눈이 펄펄 내리던 깊은 밤, “얘야, 조금만 기다려라. 아버지가 ‘돌빔’을 해갖고 올 테니” 그러면서 한밤에 나가시곤 여섯 해가 지났는데도 아니 돌아오셨다.

도랑네는 혼자서 섣달이 되면 콜클 불빛을 켜놓고 꼬박껏 아버지를 기다렸다. 따슨 마음, 착한 뜻으로 기다리면 ‘돌빔’이 온다고 하질 않았는가. 그런데 그 깊은 골엔 제 아무리 들락(문)을 꽁꽁 닫아도 바람이 새어들어 툭하면 불을 꺼뜨리고, 그러는 도막에 쑥 덤도 다 해가 더듬더듬 불을 거대니 그 깊은 골은 그야말로 시꺼먼 꺼름의 밤이었다.

그 어두운 골에 들던 한 나그네가 길을 잃고 말었다. 도둑일까. 아니다. 메척(원래) 도둑은 길을 잃질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남의 것을 노리는 녀석이 돈 많은 집을 잃으면 쌔빌 수가 없질 않은가. 더구나 도둑은 남의 먹개(벽)를 넘기도 하지만 어쨌다 하면 냅다 튀어야 한다. 때문에 길을 잃는다는 건 곧 죽음이라, 길을 아니 잃는다 했거늘, 그날 밤 길을 잃은 이는 누구였을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먼데서 마치 캄캄한 밤을 가르는 불빛만 도란도란했다. ‘옳지, 저길 가면 살겠구나’ 하고 기어갔는데 조그마한 집에 웬 꼬마 계집애가 혼자 울고 있다.

“얘야, 어쩐 일이냐?” “아버지가 돌빔을 해가지고 오신다고 나가셨는데 아니 오셔 혼자 산다”고 한다. “무슨 돌빔을 해 온다고 하셨느냐.” “네, 제가 배가 고프다고 한 것밖에 없다”며 눈을 더욱 도란거린다.

나그네는 야가 바로 한빛으로 어두움을 가른다는 그 ‘도랑네’로구나, 하고는 때(감옥)를 찾아가 소릴 질렀겠다.

“돌빔을 왔노라! 이놈들, 냉큼 들락(문)을 열지 못할까.” 아무 맞대(대답)가 없자 그냥 한손으로 들락을 미니 와르르 무너진다. 하지만 눈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삐꺽 마른 놈, 얼마나 울었는지 눈깔이 빠진 놈, 먹개를 할퀴느라 손톱이 빠진 놈, 그들과 함께 ‘도랑네’의 아버지도 끄집어내자, 망나니 여러 천이 칼을 들고 덤빈다. 뻥, 뻥! 엉덩이를 내지르자 구멍이란 구멍, 눈깔구멍, 입구멍, 귓구멍에서 모두 똥이 뿌지직.

백기완
“네 이놈들, 몸에 든 것은 몽땅 똥이었구나. 똥으로 찬 놈들은 똥통에 들어가 똥으로 헹구거라 이놈들!” 하고 똥통에 처넣어 버리니 어떻게 됐을까. 살려만 달라고 살살 빈다.

나그네는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좋다, 똥으로 똥을 닦아 똥이란 한 꼬물도 안 묻힌 놈들만 기어 나오거라.” 하지만 택이나 있을까. 똥통에서 기어 나오는 놈들마다 말끔히 똥을 떨군 놈들은 하나도 없는지라. 다시 처넣자, 운다. “똥은 냇물에 가서 닦고 오겠다”고. “그래? 그러면 네놈들 머릿속과 마음 속에 있는 똥은 어찌할 거냐?” “네~, 다시는 남의 것을 뺏어먹지도, 속여먹지도 않고, 착한 이를 잡아넣지도 않겠노라”고 쩔쩔 빈다.

이때부터 섣달그믐 “돌빔하러 왔다” 하면 냉큼 때(감옥) 들락을 열어 왔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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