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8.12.30 19:19 수정 : 2008.12.30 20:50

한살매여 얼짬마다 꽃피라. 삽화 민정기 화백

백기완-나의 한살매-끝

오래 살고 있다고 나만 보면 “욱끈(건강)이 어떠냐”고 묻는다. 나는 대뜸 “우리 같은 사람이 무슨 욱끈이 따로 있겠소. 그저 죽기 아니면 살기지요.” 그런다.

“선생님, 요즘 사람들한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습니까?” 그럴 때마다 나는 요즘 사람들은 저마다 떵이(천재)요, 모두가 깨친 이라고 뻐기는데 내가 해줄 말이 뭐가 있겠소. 굳이 듣겠다고 하면 한 서넛쯤 털어놓곤 한다.

첫째, 모랏돈빼꼴 맑걸(독점자본주의 문명)의 꾸럭(조작)에 속지 마시라는 거다. 무슨 말이냐. 내가 초등학교엘 들어가자 글파(공부)를 좀 한다고 곶대(반장)가 됐다. 그런데 선생님이 곶대라면 솜옷은 벗고 배우내옷(학생복)을 입으란다.

집으로 달려왔다. “엄마이, 나도 배우내옷…, 선생님이 곶대가 됐으면 솜옷은 벗으래.” “뭐야, 배움터란 애들끼리 어울리는 걸 배우는 데지, 으뜸이나 해 곶대가 되고, 그리고 뭐 비싼 옷을 입어야 한다고? 그 따위 배움터 때려치워라.”

그때는 그 말씀이 고까웠으나 그 한 말씀은 내 생각을 맵진(결정한) 깨우침이 됐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요즈음 모랏돈빼꼴 맑걸(독점자본주의 문명)이란 무어기에 속지 말라는 걸까. “겨루는 건 대로(자유)요, 따라서 거기서 남을 짓밟고 죽여서라도 이기라”고 한다. 하지만 대로롭게 겨루면 누가 이기겠는가. 돈 있고 힘 있는 놈이 이기게 되어 있는데도 겨뤄라, 겨뤄서 이기라는 건 모랏돈빼꼴 맑걸의 속임 손(수)이니 속지 말라 그거다.

둘째, 모랏돈빼꼴 맑걸이 거의 이백 해 이어오는 동안 사람이 맑걸의 알기(중심)임을 내세워왔다. 하지만 사람은 누룸(자연)을 따름따름(점점) 쌔코라뜨려(망쳐) 사람이 누룸의 부셔(적)가 돼버렸다. 왜 그렇게 됐을까. 돈이다. 돈을 벌고 돈을 거머쥐고자 누룸을 깨트려왔는데도 이참 모든 값(가치)은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까. 모든 걸 쌔코라뜨려서라도 돈을 거머쥐는 것만이 이룩(성취)으로 매기고 있는 잘못된 맑걸로 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 잘못된 맑걸(문명)에 속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속이는 맑걸에도 그 알짜(실체)가 있을까? 없다. 있다고 하면 죽음뿐이니 사람들이여, 모랏돈빼꼴 맑걸이란 거짓을 짓부셔 사람과 누룸을 살리자고 외친다.


셋째, 이제부터 나는 무엇을 하고자 할까. 내 가슴이 퉁퉁 뛰고 있는 그날까지 모랏돈빼꼴 맑걸(독점자본주의 문명) 쳐버리기(폐기)에 온 힘을 다하려고 한다. 왜냐. 모랏돈빼꼴 맑걸은 사람과 누룸만 죽이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있는 이와 없는 이를 딱 갈라놓고선 없는 이들을 더욱 깊은 늪으로 몰아넣어 죽이고 있다.

오늘날 벗나래틀거리(사회체제)가 그렇고, 큰골(도시)의 됨됨이가 그렇고, 일터가 그렇다. 달품(월급)을 받는 일꾼(정규직)과 맨날 품삯을 받는 일꾼(비정규직)으로 갈라놓고 있는 것도 모랏돈(독점자본)이 저지르는 사갈짓(범죄)의 한 티(증상)에 지나지 않는다.

백기완
이건 너른 빈털(공간) 속에서도 숨을 못 쉬게 하는 죽음의 맑걸이지, 사람이 따라야 할 틀거리가 아니다.

목이 말라 죽어가는 어린 것이 하루에 오천이 넘는데도 온골(세계) 놀잇돈(금융자본)의 댄(반)이나 거머쥐고 으스대던 미국 댓거(경제)의 곤두박(파탄)을 도리어 가난한 나라, 가난한 사람들한테 뒤집어씌우는 이 모랏돈빼꼴, 그거이 참말로 쓸모 있는 건가? 아니다. 마땅히 없애야 할 사갈짓이라, 나는 남은 내 삶의 모두를 그 일에 쏟고자 할 뿐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또 묻는다. “댓님(당신)은 입때껏 올바로 살았다고 보는가, 아니면 아주 데데하게 살았다고 보는가?” 그럴 때마다 내 맞대(대답)는 이러하다.

“나는 모자랬다. 아무튼지 날래(해방)란 낱말 하나를 깨우치는 데 서른 해가 걸렸으니 오죽 모자라는가.”

이때 다시 누군가가 들쑤셨다. “이봐 백기완이, 왜 그렇게 더뎠는지 알아. 쪼알털(과학적) 더듬(사고)을 못해서 그런 거”라고 하던 바로 그 녀석이 데데한 매인네털 초리(소시민적 갈등)에 빠져 쪼알털 더듬의 껍질만 남기는 것을 보고 나는 주먹은 쥐었으나 쥐어지르진 않았다. 썩어문드러진 모랏돈빼꼴 맑걸, 그걸 깨부셔야 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뜻밖에도 채원희(통일문제연구소 일꾼)가 물었다. “선생님, 남은 한살매를 어떻게 채우려고 하십니까?” 채우다니, 말이 틀렸구만. 내 한살매는 지난 일흔 해가 아니다. 오늘 하루가 바로 내 한살매의 차름(시작)이다. 아니 이 얼짬 얼짬(순간)이 내 한살매라. 그 얼짬을 앞만 보고 거침없이 뛰겠다.

통일꾼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길을 찾아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