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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1.06 18:43 수정 : 2009.01.06 21:00

전북 진안군 안천면 노성리 필자의 고향 마을 전경. 2001년 5월 금강 상류 용담댐 건설로 물에 잠기기 이전 이 지역 출신인 김학곤 화백이 그린 산수화로, 수몰지역 유물과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진안역사박물관에 전시해 놓았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3


나와 이 세상과의 만남은 초장부터 불황이었다. 우선, 일제 식민지 수탈로 시운의 맥이 빠져 버린 시기였다. 태평양전쟁 침략놀음이 한반도를 더욱 옥죄었으며, 패전 기미가 보이자 온갖 말기 증세가 기승을 부렸다. 징병이나 징용으로 남자들은 노소간에 많이 끌려갔으며, 부녀자와 어린것들은 전시 통제와 가난에 시달리면서 연명을 해 나가는 참상을 면치 못했다.

산간 농촌지역은 더욱 불리한 공간이었고, 농민 계층은 굶주림에 허덕였다. 농작물의 강제 공출 등으로 하루 세 끼를 때우지 못하는 집이 많았다.

나에게는 희망이나 이상을 담아둘 마음의 용량이 좁았다. 그렇기에 고향은 아름다운 추억보다는 안쓰러운 연민의 땅으로 떠오른다. 그 고난의 땅이 다시 진한 회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웬일일까. 나이에서 오는 정서와 감상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실향민이 되었기 때문일까. 실향민이 잃었다는 ‘고향’은 고향의 마을과 산천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의 고향마을은 이 지각 위에서 사라지고 없다. 2001년 가을에 준공된 용담 다목적댐의 물에 내 고향은 수몰되어 버렸다. 여섯 면이 물에 잠기고 2864가구 1만2천명의 이주민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떠나야 했다. 나는, 수몰이 되면 마을이 그대로 물에 잠겨 있어서, 심청이 용궁 찾아가듯이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들어가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댐의 물을 공급받는 지역에서 산업용수로뿐 아니라 생활용수(식용 포함)로도 쓰이기에 마을 건축물 전체를 깨끗이 철거하고 바닥 청소까지 하고 나서 물을 담는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통일만 되면 찾아갈 고향이 있는 보통의 실향민과는 달리 적십자사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특수 실향민이 되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더욱 그립고 아름답다 했던가.

여기에서 시곗바늘을 뒤로 돌려 우리 가정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부모님은 17살 동갑내기로 혼인하셨다. 아버지는 그 고을 일대에서는 매우 드물게 한학 공부를 한 선비였다. 가세가 기울어 농사를 겸하게 되었지만, 마을이나 인근 지역 사람들의 제사 축문·지방·편지, 그 밖에 이러저런 문서를 대필해 주시곤 했다.

내가 어린 나이에 한문과 서예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한학을 하신 아버지 덕분이었다. 그 시절에는 종이가 귀할 때여서 분판을 이용하거나 신문지에 붓글씨를 썼다.

아버지는 마음씨는 한량없이 좋으신 분이었으나, 생활력이 강하지는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함경북도 경흥에 있는 탄광까지 ‘북선 모집’을 가셨으나, 돈을 벌지는 못하고 돌아오신 적도 있었다.


한승헌 변호사
어머니는 달랐다. 아주 생활력이 강하셔서, 나의 학비 마련이나 빈곤 타개를 위해서는 (이건 훗날이지만)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하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과묵형이신 데 비하여 어머니는 당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히실 뿐만 아니라 해학으로 사람들을 웃기기도 하였다.

나는 양친의 혈육 9남매 가운데서 오직 하나 살아남은 무녀독남 외아들이다. 그래서 외롭고 귀하게 자랐다. 내 일을 도와줄 형제가 없으니까 매사를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립심이 강해졌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엔 면사무소가 있어서 ‘소재지’라고 했다. 면내가 거의 집성촌이어서, 여러 성바지가 한 마을씩 차지하고 있었으며, 소재지엔 우리 한씨 가문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끔 한씨의 선조인 기자(箕子)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며, 조선시대에는 한씨 문중에서 왕비가 여섯 분이나 나와서, “우리 한씨는 그래서 암양반이라고 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연전에 한명숙 총리가 한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던 ‘암양반’을 떠올렸는데, 그 후 한덕수·한승수 두 명의 총리가 연달아 배출되는 바람에 한씨 남성도 젠더(성) 균형이라는 체면을 살렸다고 보아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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