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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1.08 18:45 수정 : 2009.01.08 19:35

전주 북중학교 3학년 때인 1950년 3월 반 친구들과 함께한 필자.(맨 앞줄 가운데) 학제 변경으로 그해 6월 고교 입학을 한데다 곧 6·25가 터진 까닭에 졸업 기념사진도 찍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 친구들의 모습이 그립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5

일제 말기의 황폐와 광복 뒤 혼란이 겹치는 세상에서 나 같은 농촌 소년의 머리엔 청운의 뜻이니 미래의 꿈이니 하는 전망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난한 농가의 외아들인 나로서는 그저 부모님 모시고 농사와 집안일을 도와드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내 도리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지게 지고 산에 가서 나무도 했다.

물론 남의 산에 들어가 톱질로 큰 소나무 밑둥도 자르고, 낫으로 가지도 쳐다가 땔감으로 삼았다. 산지기한테 들켜서 도망쳐 오느라고 혼이 난 적도 있었다.

훗날 내가 검사가 되어 첫 임지인 통영(충무)에 가서 근무할 때, 도벌 피의자들을 많이 조사하게 되었는데, 문득 생각하니, 도벌 선배인 내가 도벌 후배들을 처벌하는 격이 되었다. 얼마쯤 가책이 되어 정상참작을 후하게 한 사례도 있었다.

각설하고,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겠다는 내 생각은 부모님의 간곡한 설득 앞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 거는 어버이의 기대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전주의 숙부님께서도, 우리 집에 와서 학교를 다니면 되지 않겠느냐며 번의를 권하셨다. 결국 나는 마음을 바꾸었다. 학비 마련이 난감했지만, 고학으로 메워 보자는 결심을 했다. 나는 학교 한 모퉁이에 의자를 놓고 난생 처음으로 독사진을 찍었다. 입시원서에 붙일 사진이었다.

아버님은 사범학교 진학을 원하셨다. 학비가 적게 드는데다 졸업 후엔 교사 자리가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애석하게도 입시에서 낙방했다. 체력 시험에서 높이뛰기만 성공했어도 합격할 뻔했는데, 그 실격이 아쉬워서 훗날 어느 잡지에 ‘높이뛰기’라는 제목으로 수필을 쓴 적도 있다.

전주에서 그냥 시골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부모님 실망하실까 걱정도 되고, 자존심 문제도 있고 해서, 차선책으로 전주 북중학교에 원서를 냈다. 다행히 거기는 합격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뒤, 교사 신축에 쓸 벽돌(전주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이 만든 것)을 등지게로 나르던 강제노역(?)도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 다음엔 고학의 회상이 이어진다. 1학년 들어 처음 시작한 것은 신문 배달이었다. 아는 사람도 없는 한 신문보급소를 찾아가서 신문 배달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전주 시내가 아닌 변두리의 인가 드문 지역을 떼어줄 테니 새 독자를 개척하여 부수를 늘리겠느냐고 했다. 조건이 매우 나빴지만 그러겠다고 다짐을 하고 열심히 뛰었다. 이른 새벽에 신문을 돌려야 하니, 추운 겨울이나 장마철에는 유난히 고생스러웠다. 신문 대금을 수금할 때면 맹견이 있는 집엔 접근이 위험해서 애를 먹었다.

한승헌 변호사
중2에 올라가서는 전주역 구내에서 좌판을 메고 이런저런 물건을 팔기도 했다. 역 대합실이나 광장 외에 열차 승객을 직접 상대할 수 있는 승강장까지 진출했다가 역무원들의 단속을 피해 철로 쪽으로 도망을 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넘어지기도 하였다. 약간 문화적인 아르바이트로, 잡지나 책을 들고 다니면서 팔기도 했다. <민족공론>이나 <삼천리> 같은 주간지가 인기였다. 공공장소나 길거리, 직장 사무실이나 가정집 할 것 없이 용기를 내어 누비고 다녔다. 눈보라 치는 겨울 날, 전주역전 오거리에 서서 행인들에게 책을 파는 한 여학생을 보고 분발하기도 했다. 그런 고학생 노릇에서 세상 인심의 따뜻함과 차가움을 두루 경험할 수가 있었다.


그 무렵엔, 정치 무대에서나 사회에서나 좌우 세력 사이 대립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정국은 혼미하여 테러가 빈발했다. 지도급 정치인들이 백주에 암살당했다는 비보는 어린 학생들에게도 큰 상처를 주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둘러싸고 격론과 갈등이 증폭되던 끝에 1948년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곧 여순(여수·순천) 반란사건과 제주 4·3 사건이 터져 세상을 불안하게 했다. 그뿐인가, 이듬해 6월에는 임시정부 주석이던 백범 김구 선생께서 현역 포병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졌다. 그때 우리는 교실 책상에 엎드려 모두 훌쩍이며 울었다. 범인의 배후는 누구일까 의문이 세상을 덮었고, 더러는 이승만 박사일 것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모두들 제법 열심히 공부했다. 머잖아 ‘6·25’가 터질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채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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