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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2월 정년퇴임한 전북대 은사 송주영 교수(가운데·경제학)에게 인사를 가서 함께 찍었다. 왼쪽이 필자. 오른쪽은 정치학과 동기인 탁진환 전북대 명예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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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6
중3 때 학제가 바뀌었다. 종전의 중학 6년제와 병행하여 고등학교제를 새로 도입한 것이다. 전북에서는 내가 다니던 전주북중에 전북고등학교(후에 전주고등학교로 개칭)가 신설되어 도내 여러 중학교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나도 신설 고교의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그리고 괜찮은 성적으로 합격을 했다. 그런데 입학식을 치른 지 사흘 만에 ‘6·25’가 일어났다. 일요일 새벽의 허를 찔린 국군은 북한의 준비된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북한군은 빠른 속도로 밀고 내려왔다. 대통령의 “서울 사수(死守)” 방송과는 달리 국군은 사흘 만에 서울을 내주고 후퇴했다. 7월16일, 마침내 학교는 휴교에 들어갔고, 학생들은 고향이나 안전한 곳을 찾아 뿔뿔이 헤어졌다. 나는 물론 부모님 계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투에서의 살상과는 별개로 민간인에 대한 살육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좌니 우니, 반동이니 부역이니 하는 이분법으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다행히 우리 고향에선 그런 참변이 일어나지 않았다. 유별나게 좌나 우를 내세우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9·28 수복으로 6·25의 판세가 뒤집힌 후, 휴교령이 풀린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나는 학교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 학비를 벌어야 했다. 요행히 방과 후의 일자리를 얻었다. 전주 역전에 있는 도장 명함집이었다. 나는 활자를 뽑고 판을 짜서 명함을 찍는 방법을 배웠고, 도장 파는 요령도 익혔다. 그 다음으로 내가 개척한 아르바이트는 프린트 필경생이었다. 프린트용 등사원지에 철필로 글씨를 쓰는 일이었다. 풍남문 근처의 프린트집 간판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 필경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주인에게 말했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라서 미덥지 않다는 눈치였다. 나는 테스트를 자청했다. 그리고 합격(?)했다. 어느덧 필경의 프로인 성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밤샘 일을 할 때에는 얼마쯤의 자부심도 생겼다. 일한 분량에 따라 보수를 받게 됨으로 수입도 괜찮았다. 다만, 시험 때도 부득이 밤샘 야근을 해야 할 때가 있어 곤혹스러웠다. 날이 새면, 남문시장 어귀에 있는 국밥집에서 싸구려 해장국을 먹고 나서 터벅거리며 학교로 갔다. 그런 날은 시험지의 글씨가 흔들려서 애를 먹기도 하였다. 어느덧 고3이 되었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진학문제가 압박해 들어왔다. 학교에서는 내가 서울대에 가기를 원했고, 주변에서도 그러리라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저 첩첩산골에서 외롭게 지내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교통 통신에서 지금과 천양지차가 있던 그 시절에 멀리 부산(서울의 대학들이 당시 임시 수도인 부산의 전시연합대학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까지 갈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이 그만큼 약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주변의 예상과는 달리 전북대학교에 원서를 냈다. 내 결정에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나는 그 다짐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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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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