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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 2학년 때인 1954년 4월 정치학과 학우들과 함께한 필자(뒷줄 오른쪽 두번째). ‘법대 학보’에 이어 대학 신문인 <전북대학교보>를 창간하라는 임무를 맡아 1인 다역을 하느라 분주했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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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8
대학생활은 좀 어설펐지만, 강의실 밖에선 그런대로 재미도 있었다. 1학년 겨울이었던가, 12월의 인권주간을 앞두고 법원과 한 일간신문사가 공동으로 인권에 관한 논문을 상을 걸고 공모했다. 나는 관심 있는 주제이기도 하고, 또 글쓰기 실력도 쌓아 볼 겸 응모했다. 그런데 그 응모에는 다른 의도가 겹쳐져 있었다. 주관하는 쪽에서 미리 내건 상금에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다행히 당선이 된다면, 그 상금으로 그동안 밀린 빚을 갚을 셈이었다. 요샛말로 하면, 실용주의였다. 다행히도 당선작 발표 기사에 내 이름이 있었다. 시상식이 열리는 전주지방법원 근처에 채무자인 친구를 나오라고 일러놓고 시상식장에 들어갔다. 나는 식장에서 나오자 곧 그 친구가 기다리는 단팥죽집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상금 봉투에서 돈을 꺼내 빚을 갚았다. 상금의 현실적 효용을 만끽했다. 나의 당선 논문은 여섯 번에 걸쳐서 신문 1면에 연재되었다. 내 글이 일간지에 활자화된 맨 처음의 일이었다. 그 후, 학교 안에서 나는 징발 대상이 되었다. 법대의 학보 편집을 맡으라는 지명이 떨어졌다. 선배 밑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하라는 데는 난감했다. 1학년생이 맡기에는 누가 봐도 무리였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기획, 원고 청탁, 편집에 교정은 물론이고 제작 현장까지 뛰어야 하는 완전한 ‘1인(미디어) 체제’였다. 권두언과 편집후기도 내 몫이었다. 분담할 상대가 없었다. ‘일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해엔 대학본부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대학신문 창간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나는 문리대의 최승범 선배(시인·국문학자·전북대 명예교수)와 함께 <전북대학교보>를 창간했고, 그 후 몇 호까지인가 계속 신문 만드는 일을 했다. 그 무렵 전북대 문리대에는 가람 이병기(李秉岐), 신석정(辛夕汀) 같은 한국 문단의 거목(시인)들이 계셔서 문학 분야가 강세였다. 나는 문리대생은 아니었지만 문학에 관심이 있어서 더러 습작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신석정 선생께서 어느 해 연말 1년 동안의 시단을 회고하는 글에서 내 시를 과찬해 주셔서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나의 아르바이트는 대학에 가서도 계속되었다.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메웠지만, 그 밖의 지출은 벌어서 충당해야 했다. 대학생이 된 후의 아르바이트는 주로 대학 교재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바뀌었다. 지금처럼 교수마다 번듯한 자기 저서를 갖추고 있는 때가 아니어서, 임시 프린트물 교재가 많았다. 어느덧 3학년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나는 졸업 후의 생업 걱정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1950년대 중반, 전쟁의 포연이 아직 가시지 않은 그때, 대학문을 나서는 젊은이의 진로는 너무도 좁았다. 지방대학 출신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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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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