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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월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자 발표를 한 날, 서울 시내를 걷다 거리의 사진사에게 우연히 찍힌 필자. 당시엔 길을 걷는 사람들을 무작정 찍어 놓고 마음에 들면 사가도록 하는 ‘이동 사진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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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9
첫 번째 고시 낙방을 체험하고 분발한 나는 군산의 선배 댁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리고 다시 고시 시험장으로 갔다. 대학 4년 때인 1956년 여름이었다. 그땐 지금과는 달리, 필기와 구술시험으로 합격자를 정했다. 필기시험 합격자 발표에 내 이름이 보였다. 구술시험은 그해 겨울방학 때 있었다. 날씨도 춥고 수험생의 마음도 추워서 이래저래 떨고 있다가 차례가 되어 구술시험 위원들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나이 들어 보이는 한 위원(대법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음, 한 군은 전북대학에 재학 중이구먼. 가만있자! 전북대학이 어디에 있더라? 광주에 있던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썅! 법률은 잘 아는지 몰라도 지리 점수는 빵점이네” 하고 못마땅한 심사가 솟았다. 지방대학을 비하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당장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합격 여부가 좌우되고 자칫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는 순간에 나는 수험생의 신분을 망각하고 반발심리가 작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무슨 문답이 오갔는지도 생각이 안 나는 채로 그 방을 나왔다. 다행히 최종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러나 기쁨 뒤에 곧 슬픔이 왔다. 고시에 합격한 뒤라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졸업논문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해지더니 졸업식 사흘 전에 그만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졸업식장이 아닌 장례식장에서 나는 외아들 독상주의 슬픔을 삼키며 아버지와 영결을 해야 했다. 나는 졸업 뒤 곧 육군에 소집되어 소정의 교육을 받고 군법무관(중위)으로 임관되어 군법회의 업무를 맡게 되었다. 1년 반 동안의 후방 근무에 이어서 58년 여름 전방으로 가게 되었다. 155마일 휴전선 중 가장 지세가 험한 중동부 전선에 있는 부대에 배치되었다. 60년의 4·19가 지난 뒤, 나는 3년 반 만에 예편하고 서울로 나왔다. 세상이 바뀐 서울, 중앙청 근처를 걸어가다가, ‘작명 관상’으로 행인들의 관심을 끄는 노인 앞에 멈춰 섰다. 거기엔 대운이 따르는 최고의 작명 표본으로 전에는 ‘이승만, 이기붕’이 적혀 있었다. 자유당 정권이 망하고 민주당이 집권한 지금엔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윤보선, 장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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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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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 5월16일 이른 아침, 이발소에서 5·16 쿠데타를 알리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박정희 소장 이름이 나오고, 혁명공약이란 말이 나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어안이 벙벙했다. 그날은 대법원장 선거 투표를 하기 위해 부산지검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상부에서 별단의 시달이 없어서 예정대로 지청장을 모시고 부산행 여객선에 올랐는데, 거제 장승포에 배가 닿자 경찰관이 달려오더니, 오늘 대법원장 투표는 안 하기로 되었으니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다음해 봄, 나는 법무부로 전보되었다. 검찰과에서 일하는 동안, 5·16의 후폭풍 속에서 애로도 많았고 화젯거리도 많았다. 군사정부 아래서 ‘에프와이’(FY)니 ‘심사분석’이니 ‘브리핑 차트’니 하는 말이 일반 공직사회에도 흘러들어왔고, 무엇이든 계량화해 설명하고 평가하는 방식이 유행했다. 어느 해 연말 업무보고 때 일이었다. 교도소 내 사망 예정자 수를 30명으로 잡았는데(장례비용 예산 편성을 위해 예상 인원을 정함), 실제로 사망한 사람은 36명이었다. 그 부분의 ‘심사분석’ 칸에는 ‘120% 초과 달성’이라고 적혀 있었다. 장관 이하 모든 참석자들이 일제히 폭소했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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