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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검 검사로 일하던 1965년 6월 어느 날, 퇴근길에 서울 서소문에 있던 청사 맞은편의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큰아들과 함께 선 필자. 석달 뒤 변호사 개업을 했으니 검사로서는 아마도 마지막 사진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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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10
나는 법무부에 근무하는 동안 장관 세 분을 모셨다. 그중 두 분은 군 법무관 출신이었고, 한 분은 대법관을 역임한 원로 법조인이었다. 어쩌다가 장차관 이·취임사 쓰는 일을 맡게 되었고, 이런저런 기념사 축사도 소관 업무와 무관하게 내 일이 되곤 했다. 장관이나 차관을 수행하여 당시의 최고 권부이던 국가재건최고회의에 가기도 하였는데, 대개는 브리핑 차트나 보고 관련 문서를 챙겨 들고 따라갔다. 서울 세종로(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 자리)에 있던 최고회의에 가면, 5·16 쿠데타의 주역이던 장교들을 회의장에서 볼 수 있었다. 현역 군인 20여명이 국정 최고기관을 장악하던 그 암흑기는 살벌하고 음침하기만 했다. 영관급 장교들이 거만한 표정으로 장차관들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다. 대규모의 특별사면(안)에 대한 보고를 하러 차관을 수행하여 갔을 때였다. 사면업무는 검찰과 소관으로서 그 대상을 정하는 요강의 작성과 비밀 유지가 중요했다. 그래서 당시 서울구치소 옆에 있던 교도관학교에서 출입을 통제하고 주야로 작업을 했다. 최종 명단은 밤중에 프린트를 해서 캐비닛에 엄중 보관해 두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 조간신문에 그 명단이 1면 톱으로 실려 나왔다. 참 난감했지만 달리 무슨 수가 있을 리도 없고 해서, 차관께 보고를 하고 최고회의에 따라갔던 것이다. 브리핑 차트를 펼쳐 걸어놓고 특별사면 시행에 관한 보고를 하려고 하자, 위원 한 사람이 나서서, 아침 신문에서 다 봤는데, 보고는 무슨 보고냐고 고함을 질러댔다. 김형욱 중령(나중에 중앙정보부장)이었다. 우리 차관께서 허리를 굽혀 사과를 했다. 여러 논의 끝에 요강과 사면 대상자의 일부를 바꾸어 신문 보도와는 다르게 조정해서 확정시키라는 지시가 나왔다. 한 신문기자의 특종 때문에 석방자가 뒤바뀌는 희비극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검토·준비할 시간 여유도 주지 않고 성급하게 법안을 올리라고 해서 애를 먹은 적도 있었는가 하면, 내가 모시고 있던 과장이 중앙정보부와 사이가 나빠져서 피신을 하는 바람에 아주 곤란을 당한 일도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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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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