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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1월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동백림 사건’ 공판에서 서독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씨가 답변을 하고 있다. 당시 구속 기소된 피고인 34명은 파리에서 활동하던 이응노 화백, 천상병 시인 등 이름난 예술인과 지식인들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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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13
1967년 7월8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동백림 거점 북괴 대남적화 공작단 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의 수사 결과를 직접 생방송으로 발표했다. 요지인즉, 유럽에 나가 있는 남한 출신의 일부 문화 예술인, 학자, 유학생들이 동백림(당시 동독권에 속하던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 공작원과 접선해 반국가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200명 가까운 사람이 연루돼 구속 기소된 피고인만도 34명이나 됐다. 그 중에는 서독 거주 작곡가 윤이상, 서울대 조교수이자 법학박사인 강빈구, 서베를린대학 박사과정의 임석훈, 파리 거주 화가 이응노, 농업문제연구소장 주석균 등 이름난 인사들이 포함돼 있어서 세인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특히 작곡가 윤이상씨에 대한 재판은 당시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국내외에서 많은 비판과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화가 이응노씨와 그의 부인 박인경씨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 이 화백은 화단이나 식자들 사이에서는 고암(顧菴)이란 아호로 잘 알려진 화가로서, 일제 때 선전(조선미술전시회의 약칭)에서 입상한 뒤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 왔으며, 광복 이후에는 홍익대와 이화여대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는 58년에 부인과 함께 파리에 건너가서 동양의 추상적 바탕과 전통 소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유럽 화단에서 크게 각광을 받았다. 이 화백은 서울구치소에서 나하고 처음 접견을 하는 자리에서 몹시 화를 냈다. “유럽 사회에서 한국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만, 이 이응노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만큼 국위 선양을 해 온 나를 평양도 아닌 서울에서 이렇게 잡아넣을 수가 있느냐?” 그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는 “서독에 있는 한국대사관 직원이 찾아와, 외국에서 국위를 떨친 유공자들을 박정희 대통령 중임 경축식에 특별 초청하는 것이니 꼭 서울에 다녀오라기에 비행기에 올랐는데, 이렇게 기만전술을 쓸 수가 있느냐”고 흥분했다. 사실, 동백림 사건의 피고인들을 놓고, 특히 독일 정부에서는 자국 거주자의 기만적 연행 내지 납치를 문제 삼아 거세게 항의했고, 서독 주재 한국대사를 사실상 추방까지 하는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제1심 첫 공판은 그해 가을에 서울형사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렸다. 피고인 수가 전례 없이 많았고, 따라서 그들의 가족 친지를 비롯한 방청객으로 법정은 초만원이었다. 거기에다 보도진의 법석까지 겹쳐 개정 벽두에는 소란스럽기까지 했다. 이응노씨에게는 6·25 때 행방불명된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꿈에도 잊지 못하던 혈육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북한 공관원의 말을 믿고 동백림으로 갔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무산된 채 헛걸음만 했다. 요컨대 전란으로 헤어진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일념으로 동독에 가서 북한 공관원을 만난 것이 반국가 범죄라는 것이었다. 그들 부부에겐 꿈에도 생각지 못한 청천벽력이었다. 그는 법정에 실려 다니면서 언론의 변덕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첫 출정을 하는 날, 구치소 호송버스에서 내리면서 태연한 척 웃음을 지었대서, 당장 그날 신문에 ‘반국가적 행위를 한 자가 뻔뻔스럽게 웃기만 했다’고 일격을 당했다. 그 다음 공판 날에는 억울한 재판에 충격을 받았는지 울면서 호송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제 비로소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이응로’라는 설명이 사진 밑에 붙어 있었다.그의 범행 부인에도 불구하고 검사는 그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기자들과 주위에서는 무기 구형에 5년형 선고면 성공한 변호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말도 안 되는 판결이라고 하고 항소심 공판에서 이렇게 변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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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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