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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1.22 18:59 수정 : 2009.01.22 18:59

1967년 시집 <노숙> 출판기념회에서 당대 이름난 문인들이 축하객으로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왼쪽부터 신동문, 필자의 고교 때 스승이기도 한 서정주, 필자, 훗날 필화사건 때 증언을 해준 유주현, 이어령, 남정현씨가 함께했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15

공직에서 나오니까 우선 심리적인 제약이 풀려서 좋았다. 쓰고 싶은 것을 쓸 수도 있게 되어, 원고 청탁에도 응하는 등 ‘표현의 자유’를 누렸다. 물론 검사 재직 때도 외부 원고를 전혀 안 쓴 것은 아니지만, 주제에서부터 제약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재야 법조인이 되자 맨 처음 제의가 들어온 데는 <법률신문> 논설위원이었다. 한국기자협회 법률고문도 수락을 했다. 그게 다 글 부역을 하는 자리였다. 도하 일간지, 각종 잡지, 기관지, 연구지, 사보 등 ‘멍석’을 깔아 주는 곳이 많았다.

그런데 맨 처음에 나온 내 책은 당돌하게도 시집이었다. 시는 대학 때나 군에 복무할 때는 물론이고 검사 재직 시절에도 틈틈이 써 온 터였다. 습작을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여기저기 발표하기도 했다. 휴전선을 끼고 있는 중동부 전선, 그 험하고 살벌한 최전방에서도 시가 꿈틀거렸듯이, 섬과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진 남해의 항구도시 또한 시심의 온상이 되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나는 충무(통영지청 근무)에서 살 때인 1961년 시화전을 열었다. 내가 붓글씨로 시를 쓰고, 그림은 당시 통영여고 미술교사로 근무하던 김종근 화백(훗날 부산여대 교수)이 맡아 주었다.

마땅한 전시공간이 없는 지방의 소도시여서, ‘미림’이라는 다방에서 시화전이 열렸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찾아낸 48년 전의 그 초청장을 보니까, 열린 기간은 61년 9월30일부터 10월8일까지 아흐레였다. 발기인 일동의 이름으로 된 ‘초청의 말씀’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예술인이 많이 배출된 이 고장에 나그네처럼 찾아와 갯벌의 내음과 더불어 살고 있는 한승헌, 김종근 두 분이 법창에서 또는 교단에서 분주한 틈틈이 다듬어 둔 시와 그림 스물한 편을 추려, 감히 여러 선생님 앞에 선을 보이기로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름난 문화 예술인이 많이 나온 그 고장에서 무모한 일을 벌인 셈이었는데, 거기엔 나를 따르던 젊은 언론인 한 사람의 부추김이 있었다. <인간귀향>이란 얄팍한 시집도 냈는데, 현직 검사의 시화전이라는 ‘이색’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전시회는 제법 관심을 모았고, 성황리에 끝났다. 폐막은 통영여고 문예부 학생들이 내 시를 낭송하는 행사로 장식했다.

몇 해 전, 부산에서 생소한 분의 편지와 함께 그때 전시했던 내 작품 한 점이 우송되어 와서 몹시 반가웠다. 발신인의 선친께서 작고하기 전 병석에 계실 적에 그 작품을 나에게 보내 주라고 당부를 하셨다는 것. 나는 감격하고 감사했다.

명색이 두 번째 시집 <노숙>이 발간된 것은 67년 12월이었다. 지금은 뉴욕에서 큰 책방을 경영하고 있는 최응표 형이 대표로 있던 문학사에서 냈다. 표지의 제자(題字)는 나에게 ‘산민’이라는 아호를 내려주신 서예 대가인 검여 유희강 선생께서 써주셨다. <대한일보> 문화부에서 일하던 박재삼 시인(작고)이 인터뷰 기사를 내주어서 기뻤다.

한승헌
출판기념회도 성황리에 열렸다. 못난 자식 돌잔치만 거창하게 한다더니, 내가 그런 격이 되었다. 그때의 초청장을 보면, 행사는 68년 3월20일 오후 6시, 신문회관(지금의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자리) 3층에서 열렸다.(‘회비 300원’이 격세감을 일깨워준다) 그런데 발기인 명단이 예사롭지가 않다. 고은·구상·김수영·김소운·김동리·박목월·백철·이어령·안수길·유주현·조병화 등 인해전술로 보인다. 지방대학 출신의 젊은 법조인 치고는 문단에 알고 지내는 분이 제법 많은 편이긴 했지만, 준비한 문우들의 과욕에 나도 동조한 셈이어서 쑥스럽다.

행사장에는 법조계와 문단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많이 참석하여 얼치기 시인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문인으로는 서정주·안수길·백철 세 분이 축사를 해주셨다. 그 뒤에 나는 한국문인협회·국제펜클럽 한국본부·현대시인협회 등의 회원이 되었으며, <현대문학> <현대시학> <한국일보> 같은 데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시인 김남조 선생은 내가 시 쓰는 일을 흐지부지하는 기색을 알아차리고, 말씀으로 혹은 편지로 왜 시를 쓰지 않느냐며 거듭 독려를 하셨다.

간혹 어떤 자리에서 나를 소개하는 분이, “변호사이자 문인이기도 한 …”이라는 식으로 말하면, 나는 반드시 한마디를 잊지 않는다. “나는 그저 무인이 아니라는 의미에서만 문인입니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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