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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1.28 18:22 수정 : 2009.01.28 18:22

1968년 11월28일 열린 ‘통일혁명당 사건’ 공판에서 주모자로 기소된 김종태(왼쪽)씨가 진술을 하고 있다. 그가 사형당한 뒤 북한에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사범대로 바꾸는 등 영웅 대접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17

1968년은 새해 벽두부터 남북 관계에 심상찮은 파열음이 울렸다. 1월21일, 북한의 특수부대가 휴전선을 넘어 서울로 잠입해 청와대 근처까지 기습해 온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1·21 사태’로 불리는 북의 침공을 계기로 남한에는 ‘멸공태세 강화’와 ‘북괴 규탄’ 구호가 거세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런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통일혁명당 사건이 터졌다.

그해 여름에 나온 수사 당국 발표를 보면,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은 어마어마한 반국가적 조직이었다. ‘주범 김종태’ 한 사람에 대한 공소 사실만도 무려 180항목에 이르렀고, 33명이나 되는 피고인들의 범죄 사실을 요약한 도표만도 18장이나 되었다.

공소 사실인즉, 통혁당은 김종태를 수괴로 하고 김질락·이문규 등을 지도위원으로 하여 64년 3월에 베트콩식 연합전선 조직인 ‘민족해방 통일전선’을 목표로 조직되었으며, 무장봉기·주요시설 파괴·정부요인 암살 등의 방법으로 대한민국 정부 전복과 공산정권 수립을 꾀하였으며, 북괴로부터 자금도 받았다는 요지였다.

이 사건은 당시의 지식인·청년·학생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청맥>이라는 잡지나 ‘학사주점’은 지식인들이나 젊은이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거기에 북의 자금이 들어왔다든가, 관계자들이 북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서 모두 잡혀가 법정에 섰으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변호를 맡은 노인영·허정길·박경호씨, 세 사람은 그 사건에서 말하자면 조연급이었다. 검찰은 노인영씨가 신아무개와 함께 독서회를 만든 것을 반국가단체 구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부를 하려는 학구적인 모임이었다. 민족해방전선이라는 단체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 사회상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한 것을 ‘사회주의 혁명사상의 고취’라고도 했다.

허정길씨에 대한 혐의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예컨대, 농촌문제에 관심이 있는 이아무개와 알고 지낸 것을 불고지죄로 몰았다든지, 육군대학 교수가 쓴 책을 빌려 본 것을 ‘이적 표현물 취득’으로 기소한 부분 등이 그러했다.

박경호씨 부분도 비슷했다. 그는 기독학생들의 모임인 경제복지회 회원들과 만나서 학문과 현실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지냈을 뿐이어서, 이것을 반국가적이라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른 피고인들과 함께 중형에 처해졌으며, 복역을 마치고 석방된 뒤에도 큰 좌절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피고인 중 ‘보스’ 격인 김종태씨는 공소사실이나 세간의 관심도로 보아 단연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에 대한 그 많은 공소사실을 다 언급할 겨를은 없으나, 그는 북의 간첩 김수장과 만나 전후 네 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였으며, 거기서 받아 온 돈으로 <청맥>을 발행한 사실을 인정하였다.


한승헌
김씨는 법정에서 매우 차분했다. 그리고 ‘수괴’로서의 자기 입지를 의식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는 자신이 평양에 갔을 때, 김일성을 만난 일이 있다고 수사기관에서 말했으나, 법정에서는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번복했다. 검사는 그가 말을 바꾸는 이유를 추궁했다. “원래 조직의 보스는 카리스마적 요소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실제로는 만나지 못한 김일성을 만난 것처럼 말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는 수감 중, 홑이불을 찢어서 만든 밧줄을 이용하여 2층 감방에서 뛰어내려 탈출을 기도했다. 그러나 그의 발이 땅에 닿기 직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1심의 사형 판결에 항소를 하지 않았다. 불복할 의사가 없어서가 아니라 법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사소송법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이 선고된 판결에 대하여는 상소(항소 또는 상고)를 포기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 이 조항의 뜻은, 설령 상소기간(판결 선고 후 7일) 내에 상소를 포기했다 하더라도 그 기간 내에는 (포기 의사를 바꾸어) 상소를 제기할 수 있다는 취지인데, 김은 이 조항을, 상소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자동적으로 상소심으로 넘어간다는 뜻으로 알고, 기간을 그냥 넘겼던 것이다. 결국 그는 항소심은 받아보지도 못하고 1심이 확정되어 사형 집행이 되고 말았다. 변호인이나 교도소 관계자가 피고인에게 법의 취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그는 사형이 확정된 뒤에도, 다른 공동 피고인들의 항소심 공판에 증인으로 나와, 태연한 모습으로 증언을 하기도 했다.

학사주점 대표이던 이문규씨도 형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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