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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7월 담시 <오적> 사건 법정에서 시인 김지하, <사상계> 발행인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 <민주전선> 주간 김동성(왼쪽부터)씨가 재판을 받고 있다. 이 필화사건을 계기로 김지하씨는 국내외에 ‘반독재 저항시인’으로 떠오르는 한편, 박정희 정권의 표적으로 낙인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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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18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길 하나 쓰것다.’ 이렇게 시작되는 김지하의 담시 <오적>은 박정희 군사독재하의 공포와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그에 정면으로 저항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판소리 양식을 현대적인 문학형식 속에 담아낸 점에서도 적지 않은 관심을 모았다. 이 시에서 오적이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모두 짐승 이름을 뜻하는 희한한 한자로 음을 맞추어 더욱 흥미로웠다. <오적>은 300줄 남짓한 풍자시로서, <사상계> 1970년 5월호에 처음 발표되었다. 정부 당국은 책방에서 책을 수거하고 판매를 금지시키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으려 했으나, 그 시가 당시 야당인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전재되고 나서 사태가 일변했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한 3선 개헌 날치기 처리(1969년 9월14일)와 이에 따른 국민의 저항, 정인숙이라는 젊은 여인의 피살을 둘러싼 정부 고위층의 스캔들 파문, 서대문의 와우아파트 붕괴로 인한 많은 주민의 매몰, 동빙고동의 세칭 ‘도둑촌’을 비롯한 부자들의 호화주택 물의 등이 겹치고 얽혀서 민심이 흉흉했다. 바로 그런 시기에 <오적>이라는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데다, 당시 유료 가판으로 일반 시민들에게도 많이 읽히던 야당 기관지에까지 그 시가 전재되자, 그 작가인 김지하씨가 마침내 구속되었다. <사상계>의 발행인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 <민주전선>의 주간 김용성씨 등도 묶여 들어갔다. 그리고 함께 법정에 서게 되었다. 부정부패를 고발한 시를 썼거나 지면에 실은 것이 무슨 죄가 된다는 말인가? 남한 사회의 빈부격차를 부각시킴으로써 ‘계급의식을 고취한 용공작품’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김 시인은 법정에서 “오적이 있으니까 <오적>을 썼을 뿐이다”라는 명답을 앞세우고 이렇게 반론했다. “내 시를 자꾸 용공이라고 하는데, 부정부패 그 자체가 이적이 될지는 몰라도, 그것을 비판하는 소리가 이적이 될 수는 없다.” 김 시인은 훗날, 그 재판을 회고하는 글에서 “재판이 열리고 변호인 반대신문이 진행되자, 선생(변호인인 필자)의 그 간결하고 세련된 유명한 꼭지따기가 시작되었다”고 얼마쯤 필자를 ‘예우’한 뒤, 다음과 같은 문답을 인용했다.‘변호인: 피고인은 공산주의자입니까? 피고인: 아닙니다. 변호인: 그럼, 왜 이런 재판을 받게 됐습니까? 피고인: 나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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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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