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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1.29 18:37 수정 : 2009.01.29 21:07

1970년 7월 담시 <오적> 사건 법정에서 시인 김지하, <사상계> 발행인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 <민주전선> 주간 김동성(왼쪽부터)씨가 재판을 받고 있다. 이 필화사건을 계기로 김지하씨는 국내외에 ‘반독재 저항시인’으로 떠오르는 한편, 박정희 정권의 표적으로 낙인찍혔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18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길 하나 쓰것다.’

이렇게 시작되는 김지하의 담시 <오적>은 박정희 군사독재하의 공포와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그에 정면으로 저항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판소리 양식을 현대적인 문학형식 속에 담아낸 점에서도 적지 않은 관심을 모았다.

이 시에서 오적이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모두 짐승 이름을 뜻하는 희한한 한자로 음을 맞추어 더욱 흥미로웠다.

<오적>은 300줄 남짓한 풍자시로서, <사상계> 1970년 5월호에 처음 발표되었다. 정부 당국은 책방에서 책을 수거하고 판매를 금지시키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으려 했으나, 그 시가 당시 야당인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전재되고 나서 사태가 일변했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한 3선 개헌 날치기 처리(1969년 9월14일)와 이에 따른 국민의 저항, 정인숙이라는 젊은 여인의 피살을 둘러싼 정부 고위층의 스캔들 파문, 서대문의 와우아파트 붕괴로 인한 많은 주민의 매몰, 동빙고동의 세칭 ‘도둑촌’을 비롯한 부자들의 호화주택 물의 등이 겹치고 얽혀서 민심이 흉흉했다. 바로 그런 시기에 <오적>이라는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데다, 당시 유료 가판으로 일반 시민들에게도 많이 읽히던 야당 기관지에까지 그 시가 전재되자, 그 작가인 김지하씨가 마침내 구속되었다. <사상계>의 발행인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 <민주전선>의 주간 김용성씨 등도 묶여 들어갔다. 그리고 함께 법정에 서게 되었다.

부정부패를 고발한 시를 썼거나 지면에 실은 것이 무슨 죄가 된다는 말인가?

남한 사회의 빈부격차를 부각시킴으로써 ‘계급의식을 고취한 용공작품’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김 시인은 법정에서 “오적이 있으니까 <오적>을 썼을 뿐이다”라는 명답을 앞세우고 이렇게 반론했다. “내 시를 자꾸 용공이라고 하는데, 부정부패 그 자체가 이적이 될지는 몰라도, 그것을 비판하는 소리가 이적이 될 수는 없다.”

김 시인은 훗날, 그 재판을 회고하는 글에서 “재판이 열리고 변호인 반대신문이 진행되자, 선생(변호인인 필자)의 그 간결하고 세련된 유명한 꼭지따기가 시작되었다”고 얼마쯤 필자를 ‘예우’한 뒤, 다음과 같은 문답을 인용했다.


‘변호인: 피고인은 공산주의자입니까? 피고인: 아닙니다. 변호인: 그럼, 왜 이런 재판을 받게 됐습니까? 피고인: 나도 모르겠습니다.’

한승헌
“강타였다. 사건의 실체를 한두 마디 물음으로 요약해 간단히 드러내버리는 거였다”라고 그는 회상했다.

나는 법조계의 가장 존경하는 선배인 이병린 변호사님(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역임)과 함께 김 시인을 변호했다. 변호인 쪽은 증인 신문과 작품 감정을 통하여 검찰 주장에 반격을 가했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선우휘, 시인 박두진, 숭전대 교수 안병욱, 이 세 분은 감정서를 통하여, 고려대 교수 이항녕, 작가 김승옥, 두 분은 증언을 통하여, <오적>은 일부 특수층의 부정부패에 대한 공분의 표시이며, 작가의 사회적 책임을 자각하는 문학자라면 그 정도의 표현은 당연한 것이라는 요지의 의견을 밝혀 검사의 용공론을 무색하게 했다.

그 후 구속 피고인들은 모두 보석으로 풀려났는데, 김 시인은 지방에 있는 결핵요양소에 들어갔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은 각각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에 처할 것이로되, 형의 선고를 유예한다는 1심 판결을 받았다. 한편, 그 시를 처음 게재한 <사상계>는 정부로부터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처분을 받았으나, 대법원까지 소송에서 연승함으로써 법적으로는 다시 소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러가지 타격으로 잡지는 수명을 이어가지 못했다.

서울형사지법 재판부의 판결에서 제외되었던 김 시인에 대해서는 후일 74년의 민청학련 사건에 그가 연루되어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오적> 사건도 이송 병합되어 어물쩍 유죄 판결에 휩쓸려 들어갔다.

결국 <오적> 사건에 대해서는 일반 법원의 판결은 없었고, 군법회의 판결만 나온 셈이었다. 온 세계의 관심을 모았던 탄압적 필화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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