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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살고 있던 서승(가운데)씨가 1990년 2월28일 19년 만에 풀려나 후원자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1년 앞서 풀려난 동생 준식(맨 오른쪽)씨 모습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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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20
지난날 이 나라에선, 정부가 곤경에 처하거나 무슨 역습의 필요가 있거나 혹은 선거 등 중요한 정치적 고비가 닥치면 으레 간첩이나 국가보안법 사건 발표가 나왔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도 시기적으로 범상치가 않았다. 실인즉, 재일동포 모국 유학생 서승(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씨는 일본 교토에 있는 자택에서 방학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오던 1971년 3월5일, 김포공항에서 보안사령부 분실로 끌려가, 간첩 혐의로 가혹행위를 당하면서 조사를 받고 나온 적이 있었다. 아우 서준식(서울대 법대 유학 중)씨도 며칠 뒤 같은 고초를 겪었다. 71년 4월27일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해 9월14일 새벽, 여당 의원들만으로 날치기 처리한 ‘3선 개헌’ 덕분에 장기 집권의 관문 앞에 와 있었다. 그 투표일을 열흘가량 앞둔 4월18일, 이들 서씨 형제는 서빙고에 있는 보안사 대공분실로 다시 연행되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4월20일, 육군 보안사령부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정부 전복을 획책하고 있던 간첩단 4그룹 51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거기엔 물론 서승, 서준식 형제의 이름이 나와 있었다. 혐의는, 그들이 북한에 가서 지령을 받고 서울대에 지하조직을 만들어 학생의 군사교련 반대 투쟁과 박 대통령 3선 반대 투쟁을 배후 조종하여 인민봉기를 선동하고 정부 타도와 공산혁명을 기도했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측근 참모인 김상현씨를 통하여 그에게 일본의 불순한 정치자금을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학생운동에 타격을 주고, 김 후보에게 용공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일거양득을 노린 각본이었다. 서승씨는 물론 이를 부인했고, 그래서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 오죽했으면 조사관에게 “제발 죽여 달라!”고 몇 번이나 애원을 했을까. 그런 때문인지, 밖에서는 서승씨가 고문으로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나는 접견을 신청했으나 거듭 거절을 당했다. 변호인 접견권은 법으로 보장된 만큼 어떤 핑계로도 막을 수 없는데도 막무가내였다. 겨우 접견이 ‘허용’된 것은 구속된 지 석 달 만, 외부인으로서는 내가 처음 그를 만나게 됐다. 그런데 서울구치소의 담당자는 나를 변호인 접견실이 아닌 의무실로 안내하는 것이 아닌가? ‘옳지. 고문 상처를 아직도 치료 중에 있구나’ 하고 나는 직감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들것에 실린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굴과 몸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어서 누군지 식별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온몸의 화상은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사실대로 말해 달라고 했다. 그는 심한 고문을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몸의 화상은 자해로 생겼다는 것이었다. 고문에 못 이겨 다른 학우들에게 불리한 자백을 해서는 안 되겠기에, 잠시 수사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난로 연료 탱크의 기름을 머리에 붓고 불을 붙였다는 대답이었다. 얼마나 혹독한 가혹행위를 당했으면 …, 결국 그의 몸의 화상도 조사 과정의 고문과 무관하지 않다는 판단이 섰다. 그는 공판에서, 아우와 함께 북한에 다녀온 사실 외에는 주된 혐의 내용을 모두 부인했다. 그러나 1심은 그에게 사형을, 아우에게는 15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항소심에서는 각각 무기와 7년으로 형이 낮아졌다.두 형제의 거듭된 고문 폭로와 이에 따른 증거 조작을 주장한 항소 이유에 대해 2심 판결문은 “일건 기록을 잘 살펴보아도 피고인이 수사기관의 고문이나 사술에 의하여 범행 사실을 진술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보아지지 않는다”고 배척을 했다. 세상에, ‘일건 기록’에 고문 사실을 기재해 놓을 양심적 혹은 바보적 공무원이 어디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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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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