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2.09 18:04
수정 : 2009.02.09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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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 ‘유신헌법 반대’를 주장하다 구속된 ‘야당 삼총사’ 조윤형, 김상현, 조연하(왼쪽부터) 의원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이들을 파렴치범으로 몰아 끝내 실형을 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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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25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 때, 여야 후보의 유세 대결은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나는 박정희·김대중 두 후보의 유세를 모두 현장에서 들었다. 여당인 공화당 의원들만의 새벽 날치기로 처리한 ‘3선 개헌’ 덕분에 박정희 대통령은 한 번 더 출마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자 야당 후보는, 앞으로 선거 없는 총통제가 될 것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이에 박정희 후보는 야당의 모략이라고 받아넘겼다. 그는 장충단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 달라고 국민 여러분에게 호소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놀랐다. 박씨는 그처럼 말의 기교를 구사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날 발언은 아주 이례적이었다. 어쨌든 청중들은 박수를 쳤다. 한 일간지의 정치부 기자와 함께 유세장을 빠져나오는데, 그 기자 가로되, 대통령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분명히 말했으니, 바로 이 말이 기사의 제목감이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뜻밖의 말에 놀라서 한마디 했다. “대통령을 더 안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뽑아 달라는 호소를 다시는 않겠다고 했는데 ….”
결국 도하 신문의 기사 제목은 거의 틀렸고, 내 말이 적중했다. 다음해 가을, 박 대통령의 ‘10월 유신’ 선포가 그 증명이었다.
72년 10월17일, 박 대통령은 난데없이 ‘대통령 특별선언’이란 것을 발표했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킨 다음, 비상국무회의에서 만든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로 ‘확정’시켰다. 개헌의 핵심은, ‘통일주체 국민회의’라는 어용 집회에서 대통령을 간선하도록 바꾼 것이었다. 이런 헌법 파괴의 산물인 유신헌법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분노와 반대가 거세어지자, 정권은 그 탄압에 나섰다. 세칭 ‘야당 삼총사’라 불리던 국회의원 세 사람, 김상현·조윤형·조연하씨가 그 표적이었다.
정치적 탄압 사건일수록 죄명은 파렴치범으로 포장을 하는 법. 이 사건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내가 변호한 김 의원에게도 뇌물죄가 끼워져 있었다.
그는 그 전해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핵심 참모였다. 그리고 8대 국회 내무위원회의 야당 간사였다. 그는 추석을 앞두고 여당 간사와 합의하여 서울시의 공사업자로부터 소위 ‘떡값’을 받아 가지고 내무위 소속 여야 의원들에게 20만원씩 나누어 준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뇌물수수죄로 입건 구속한 것이다. 여당 간사와 함께 한 일인데도, 야당 간사인 김 전 의원만 잡아다가 재판에 넘겼다. 나는 그러한 정략적 탄압과 편파적인 조처를 비난하고 이른바 대가성 문제도 거론하고 나섰는데, 재판부는 마이동풍이었다. 김 의원은 법정에서나 구치소에서나 야당 투사다운 언동을 보였다.
그에게는 징역 3년(조윤형씨 3년, 조연하씨 2년6개월)이 선고되었지만, 2년 복역하고 형 집행정지 결정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풀려나온 뒤 나에게 이런 인사말을 했다. “형님 덕분에 2년 동안 국비장학생 과정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그의 악담은 진일보하여 다음과 같이 비약했다. “한 변호사가 변호한 사람치고 징역 안 간 사람 있으면 손 들어 보시오.” 나로선 뭐라고 반론할 처지도 아니어서, 좌중의 폭소에 휩쓸려 같이 웃기도 하는데, 그런 말의 사용 빈도가 줄어들지 않아서 부득이 나도 방어에 나섰다. “징역 가면서도(징역 갔다 와서도) 나보고 고맙다는 인사 안 한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시오.” “내가 변호한 사람치고 석방 안 된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최악이라도 만기 석방으로 다 나왔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변호가 먹혀들지 않는 사법현실 앞에 어찌 자괴와 회한이 없었겠는가?
그와 나는 피고인과 변호인 사이로 친해졌는데, 나중엔(소위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 공동 피고인으로 군법회의에서 같이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서울구치소와 육군교도소에서 함께 감옥살이를 하면서, 그가 놀라울 정도로 옥중 공부에 열심인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감탄했다.
그는 두 번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와서 이런 소감을 글로 남겼다.
“4년3개월 동안 하루 13~15시간씩 책과 씨름했으니까 정식으로 대학 나온 사람과 같습니다. 그래서 후배들보고 서울대학 나왔다고 내 앞에서 뻐기지 말라고 하면, ‘아이구 형님’ 이럽니다. 허허!”(그의 학력은 고교 중퇴였던 것이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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