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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2.15 18:46 수정 : 2009.02.16 01:08

1974년 2월 유신헌법 철폐 100만명 서명운동을 벌여 이른바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된 장준하(오른쪽)·백기완(왼쪽) 선생이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긴조 1호’는 이들의 활동을 막기 위한 것이라 할 만했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29

‘극적’(劇的)이란 말은 의외성과 예측 불능의 반전(反轉)을 의미하는가 하면, ‘연극’에서 보듯이 꾸밈, 놀라움의 뜻도 함축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선포와 유신헌법은 ‘극적’이란 말이 갖는 모든 의미를 다 내장하는 희대의 성과물이었다.

그런 폭압적 연출에 분노한 ‘유신통치 반대’의 함성은 일부 권력 추종자들을 빼놓고는 그야말로 범국민적이었다. 여기서 정권 쪽은 반대자 구속이라는 전가(傳家)의 칼을 휘둘렀다. 앞서 이 연재에서 언급한 김상현 의원 등 ‘야당 3총사’ 구속 사건이나 박형규 목사 등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됨 직했다. 1973년 8월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일본에서 감행된 김대중 전 야당 대통령 후보 납치 사건 또한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하는 그를 제거하기 위한 국제범죄였다.

그 후 내가 변호한 고려대생들의 ‘검은 10월단 사건’(야생화 사건)과 서울대 문리대생 시위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그처럼 정부의 회유나 위협에도 불구하고 유신헌법 철폐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 격화되어 가고 있었다.

마침내 73년 성탄절을 하루 앞둔 12월 24일, 서울 기독교청년회(YMCA) 회관에서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가 결성되어, 개헌청원 백만명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장준하(<사상계> 대표), 백기완(민족문제연구소장) 두 분의 주도로 시작된 이 운동에는 함석헌, 김재준, 김수환, 백낙준, 안병무, 홍남순, 계훈제, 김동길, 박두진, 이호철, 김찬국, 김윤수, 법정 등 각계 인사 30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범국민적인 일대 운동의 물결을 예고하였다.

이에 놀란 정권에서는 김종필 총리와 박정희 대통령이 연달아 경고와 위협을 가하는 담화를 냈으나, 날로 번져나가는 개헌 서명의 불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황한 박 정권은 74년 1월 8일, 소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라는 것을 선포했다. 그 내용인즉, 유신헌법을 부정·반대·왜곡·비방하는 일체의 행위, 그 개정이나 폐지를 주장·발의·청원하는 행위를 금하고, 이에 위반하는 사람은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개정하자는 말만 해도 15년 징역을 보내겠다는 것인데, 이는 유신헌법 자체에도 위반되는 내용이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런 긴급조치를 비방하는 행위도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그 조치가 발표된 지 닷새 만에 앞서의 장준하, 백기완 두 분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의 ‘긴급조치 1호 위반사건’ 제1호는 당연히(?) 위 두 사람의 몫이 되었다.

삼각지 국방부 근처 언덕바지에 있는 군용 퀀셋 건물 안에서 비상보통군법회의가 열렸다. 나는 그해 여름과 가을 (그 뒤에 긴급조치 4호까지 나와서) 내내 그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재판 같지도 않은 재판에 시간과 정성을 바쳐야 했다. 위 두 사람에 대한 사건은 초고속으로 처리되었다. 74년 1월 15일 구속(영장), 1월 25일 기소, 1월 31일 첫 재판에 각 징역 15년 구형, 다음날인 2월 1일 각 징역 15년 선고- 이런 식이었다. 그야말로 ‘과속 스캔들’이었다.


두 분은 법정에서 유신헌법 철폐운동의 정당성에 대하여 당당하게 진술을 하였다. 나와 백기완 선생 사이에 이런 문답이 오갔다.

- 이번에 중앙정보부에 잡혀갈 때 주머니에는 단돈 5천원밖에 없었다는데요?

= 네, 딱 5천 원밖에 없었습니다.

- 그동안 개헌운동을 주도해 오면서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을 터인데요.

= 네, 돈이 별로 필요 없었습니다. 민주주의와 통일을 바라는 엄청난 민심이 바로 우리의 자금이요, 힘이었으니까요.

한승헌 변호사
눈물겨운 ‘푼돈’ 이야기는 장준하 선생의 주머니에서 더욱 큰 감동의 씨앗으로 잠겨 있었다. 그분의 주머니에선 단돈 180원이 나왔던 것이다.

징역 15년 구형 하루 만에 판결도 역시 징역 15년이라, 나는 허탈했다. 그래서 한마디 했다. “후세의 역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찰제는 백화점 아닌 군법회의에서 먼저 확립되었다’라고.” 내가 화풀이 겸해서 처음으로 쓴 ‘정찰제 판결’이란 말은 그 후 여러 사람에 의해서 말이나 글로 애용되기에 이르렀다.

두 분은 형기와 무관하게 풀려나왔는데, 장 선생은 75년 여름, 내가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적에 몇 번이나 법정에 나오셔서 나를 위로 격려해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 방청을 다녀가신 바로 그 주말에 ‘의문사’라는 의혹을 남기고 타계하셨다. 백 선생은 고문 후유증에 고생하면서도 꾸준히 반독재운동을 하다가 감옥행을 되풀이하는 고초를 겪었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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