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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2월 긴급조치 이후 첫 개헌 시국선언을 주도해 구속된 ‘기독교 성직자 사건’ 피고인들이 군사법정에 서 있다. 김진홍·이해학·이규상 전도사, 인명진 목사, 박윤수 전도사, 김경락 목사 등 6명이다.(오른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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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30
유신헌법 철폐를 목적으로 하는 ‘개헌청원 백만명 서명운동’은 기독교계에서도 불길이 붙었다. 이미 남산 야외음악당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을 핑계로 한 목사·전도사 구속을 계기로 기독교계 일부에서는 반독재 반유신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긴급조치’ 후 첫 개헌 시국선언이 터졌고, 예정된 순서처럼 관련자들은 구속되었다. 앞서 부활절 예배사건으로 기독교 쪽과 인연을 맺은 나는 아무래도 다시 ‘징발’될 것만 같아서 미리부터 어깨가 무거웠다.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나온 지 이틀 뒤인 1974년 1월 10일, 활빈교회 전도사 김진홍, 주민교회 전도사 이해학 두 사람은 ‘긴급조치 철회와 개헌청원 서명 허용’을 요구하는 시국기도회를 열기로 합의한다. 이어서 김경락(도시산업선교연합회 총무 겸 영등포 중앙교회 목사), 이규상(수도권 특수선교협의회 전도사), 인명진(도시산업선교연합회 목사), 박윤수(창현교회 전도사) 등 젊은 성직자 6명이 이에 찬동하고 나왔다. 이들의 공통점은 각기 맡고 있는 특이한 직분에서도 짐작이 가듯, 도시산업선교라는 특수선교에 헌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1월 17일 오전 10시, 종로 5가 기독교회관 7층에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김관석 총무(목사)의 방에 기습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김경락 전도사의 사회로 ‘1·8 긴급조치 철회 및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촉진하기 위한 시국선언 기도회’를 열었다. 이해학 전도사가 시국선언문을 읽은 데 이어 참석자 모두 개헌청원 서명록에 서명했다. 같은 건물 안에 있는 다른 기독교 기관과 단체 사무실을 찾아가서 선언문을 배포하고 개헌 서명을 받았다. 물론 그들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그뿐인가, 많은 기독교계 인사(주로 ‘종로 5가’ 인사)들이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중정의 조사 당시, 김진홍·이해학 두 사람은 서로 자기가 주범이라고 우기고 나섬으로써 조사관들을 오히려 당혹스럽게 만들었다고 한다. 결국 김진홍 전도사를 ‘주범’으로 삼았는데, 그 까닭은 그가 선언문 등 문건의 원고를 쓸 만큼 달필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울 용산 삼각지 언덕의 한 퀀셋(간이건물)에서 열린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은 긴급조치 군법회의답게 살벌했다. 가족 외에는 방청이 허용되지 않았고, 기자도 출입이나 메모조차 제한되었다. 단상에는 재판장(육군 중장), 심판관 3명(육군 소장·판사·검사 각 1명), 법무사(육군 중령), 이렇게 5명이 앉아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는 데 비하여, 단하의 피고인들은 오히려 의연하고 당당했다. 법정 단상 단하 사이에 오간 말의 ‘강펀치’에는 더러 반칙 같기도 하고 핵심 같기도 한 우문현답이 작열(灼熱)했다. 단상의 심판관인 현역 소령이 선공(先攻)을 날렸다. “왜 목사 전도사들이 하나님 믿으라는 전도는 안 하고, 정치 문제에 간섭을 해서 혼란을 일으키는가?” 그러자 단하에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반격의 포성이 울렸다. “어찌하여 군인들이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망각하고 여기 와서 재판을 한다고 앉아 있는가?”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지신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정의와 그리스도의 진리에 입각한 성서적 결단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기독교 신자가 아니던 나는 기독교와 성서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어서 법정 신문이나 변론에서 그들의 뜻을 대변하는 데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부랴부랴 성서를 비롯한 기독교 서적을 소나기식으로 중점 학습하여 반대신문 사항과 변론 요지서를 작성한 뒤, 기독교인인 아내의 감수를 받아가지고 법정에 나가서, 마치 나도 뭐 좀 아는 것처럼 발언을 하기도 했다. 피고인석에서 나의 변론을 들은 이해학 전도사는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다. “한 변호사님은 목회자들의 사회참여, 특히 불의한 정권에 도전한 것을 소신껏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중략) 우리가 빈민들을 역사의 주인으로 세워서 민주세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것이라는 신학적 증언을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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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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