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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5월 잡지에 기고한 글 ‘어떤 조사’를 빌미로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필자가 법정에 섰다. 전례가 없는 변호사의 필화 사건을 맞아 사상 최대인 129명의 변호인단이 나선 화제의 재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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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40
1975년 1월 21일, 이틀 밤에 걸친 철야(잠 안 재우기)조사는 내 체력으로 견디기는 힘든 고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잘 버티었다. 그리고 사흘 만에 풀려났다. 억지 조작에 맞서서 내 할말을 다 하고 나왔다. 몸은 붙들려 다니면서도 할일은 해야 했다. 광고 탄압을 받고 있던 <동아일보>의 격려광고 성금 모으기를 계속했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문학인 165인 선언’ 발표 현장에도 나갔다. 그런데, 3월 14일 김지하 시인이 반공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복역하다 2월 17일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는데, 한 일간지에 ‘인혁당 사건 조작’ 운운의 기고를 했대서 출감 27일 만에 다시 구속되었던 것이다. 나는 몇 분의 변호사들과 상의하여 변호인단을 만들고 그 변호인 선임계를 직접 서울지검에 가서 제출했다. 보통 문서 제출은 사무장이 하지만, 혹시 무슨 말썽이라도 생기면 괜히 사무장이 시달릴까봐 내가 직접 들고 가서 제출했던 것이다. 낮 방송에서 김지하 변호인단 구성 뉴스가 나간 직후 ‘중정’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보고 김지하 변호인을 사퇴하라는 요구였다. 내가 한 마디로 거부하자 저쪽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그래도 나는 참고, 변호사의 책무에 대한 원론적인 설명을 하면서 이해를 시키려고 했다. 상대는 다시 잘 생각해 보라는 위협적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 다음날 또 전화가 왔는데, 지난 1월 반공법 사건의 피의자로 조사받은 일을 기억하느냐면서 강압적인 말을 하기에 나도 냉담한 어조로 짤막하게 응수했다. 변호인 사퇴 요구는 지나친 강압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즉 3월 21일 밤, 나는 서울 시내의 한 집회장소에서 잠깐 문 밖으로 나왔다가 대기하던 중정 차량에 실려 ‘남산’으로 압송됐다. 그리고 전에 조사받은 글 ‘어떤 조사’의 용공성 여부를 놓고 다시 설전을 벌인 후 정식 구속됐다. 문제의 글을 쓰기 전에도 나는 생명과 형벌 문제를 다룬 글을 써 왔고, 한국앰네스티의 사형폐지 건의문을 작성하는 등 캠페인을 주도했다는 사실도 밝혔는데,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몸은 서울구치소로 실려 가서 소위 입소절차를 밟았다. 푸른 수의(囚衣)로 갈아입은 다음 플라스틱 식기와 대나무 젓가락 두 개를 들고 교도관을 따라가서 그가 열어주는 감방문 안으로 들어가자 등 뒤에서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이렇게 해서 나의 수감생활은 시작되었다. 가족 접견도 서적 차입도 모두 불허라고 했다. 거기에다 독방이고 보니, 이른바 ‘절대고독’ 그 자체였다. 시간과의 대치상태가 나를 힘들게 했다. 오스카 와일드가 <옥중기>에 썼듯이 ‘하나의 긴 순간으로서의 고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회전할 뿐인 시간 그 자체’와 마주해야 하는 운명이 시작되었다. 어느날 밤 늦은 시각, 완전히 폐방된 뒤인데도 인기척이 있어 방문 쪽을 보니, 누군가가 풀라스틱 식기를 들이밀고 사라졌다. 그 안에는 우유에 찐빵 두 개가 떠 있었다. 무슨 미스터리 소설 같은 일이었다. 날이 샌 뒤 알게 된 사실인데, 같은 사동 끝방에 있는 사형수가 나의 혐의, 곧 사형 폐지를 주장하는 글을 썼대서 잡혀 온 것을 알고 감사하는 뜻으로 그처럼 먹을 것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내 글 한 편으로 자기 운명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런 호의를 표시하다니, 나는 숙연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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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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