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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03 18:11 수정 : 2009.03.04 00:06

1975년 7월 ‘어떤 조사’ 반공법 필화 사건의 대규모 변호인단이 법정 밖에서 피고인인 필자의 출두를 기다리고 있다. 민병훈·김제형·이돈명·기세훈·길기수·김준수(오른쪽부터) 변호사 등의 모습이 보인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41

1975년 4월 내 사건 법정에서는 우문현답에 진문진답이 속출했지만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검찰 쪽 증인은 복역중인 간첩, 월남 전향자, 대공심리전 요원, 공안기관 관련자 등 특수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 글이 용공적이며 북괴 주장과 같은 내용이라고 했다. 그중 한 사람은 내 글 끝머리에 있는 “당신의 소망이 명부의 하늘 밑에서나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는 조사(弔辭)의 관용적인 표현을 “저승에 가더라도 적화통일의 꿈을 이루기 바란다는 뜻”이라고 ‘증언’했다. 그러자 변호인이 물었다. “증인! 저승에도 남북이 분단되어 있어서 북쪽에서는 공산당이 정권을 잡고 있나요?” 이 통쾌한 반문에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를 위해서는 안수길·유주현(이상 소설가), 이어령(평론가), 강원룡(목사), 홍윤숙(시인), 이우정(교수), 박연구(수필가)씨 등 일곱 분이 증인 또는 감정인으로 나오셨다. 그 무렵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반공법 사건의 증인이나 감정인으로 나오자면 대단한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 했다. 나로 해서 그분들에게 난처하고 부담되는 고역을 지운 것 같아서,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평소의 허약체질과 소화기능 장애가 한여름의 수감생활로 더욱 심해졌다. 보다 못한 변호인단에서 보석을 청구했으나 기각되었고, 신체감정 유치신청 역시 기각이었다. 그러면서 무엇에 쫓기듯이 연달아 재판을 서두르자 변호인단은 담당 판사가 불공정한 재판을 할 염려가 있다고 보아 법관 기피 신청을 하고 법정에서 퇴장을 하기도 했다. 그 기피신청은 예상대로 기각됐는데, 그 이유로 ‘신속한 재판을 받을 헌법상의 권리’를 내세웠으니, 실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9월 11일 오전에 열린 선고 공판에서 나는 징역 1년6월, 자격정지 1년6월의 실형을 받았다. 몇 달 고생시켰으니 집행유예로 풀어주지 않겠느냐는 변호인단과 일반의 기대와는 달리 실형을 먹게 되자, 이 사건의 재판을 누가 쥐고 하는지를 다시금 짐작할 수가 있었다. 판사가 선고를 한 다음 판결 초고(草稿)를 단 아래의 서기(지금의 실무관)에게 건네는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는데, 그날은 판사가 초고를 집어던지는 동작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자기도 모르게 드러낸 것 같아서 안쓰러웠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이상한 대목이 있었다. 검사는 내 글이 “북괴 간첩 김규남을 애도함으로써 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하였다”라고 해서 기소했는데, 1심 판결에는 ‘김규남 애도’ 운운하는 말은 간 곳이 없고, 난데없이 “북괴의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에 동조하였다”라는 판시가 나와 있는 것이었다. 공소사실이 인정되지 않더라도 좌우간 ‘유죄’로 만들 수밖에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항소심 재판장은 나와 고시 동기이자 군법무관 입대·내무반 동기이며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그가 내 사건 재판을 맡을 수 없다고 ‘회피’를 할 줄로 알았는데, 그냥 재판을 하게 되었다. 하기는 애초에 나에 대한 구속영장도 그가 발부한데다, 나를 기소한 서울지검 공안부의 부장도 나와 고시 및 법무관 동기였다. 변호인단에 참여한 고시 동기들까지 합치고 보면, 내 재판은 피고인·검사·판사·변호인 등의 배역 전부가 고시 동기생들끼리의 행사였던 셈이다.

수감생활은 아홉 달 동안이었지만, 계절로는 춘하추동을 다 거치게 되어 다양한 경험을 했다. 12월 19일 석방된 뒤 몇 군데 인사를 하러 다녔는데, 항소심 재판장을 맡아서 고심했을 바로 그 친구한테도 가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때 우리 사이에 오간 이야기는 누구 말마따나 ‘무덤까지 안고 간다’는 다짐을 준수하는 뜻에서 ‘정보 공개’를 사양하기로 한다.


한승헌 변호사
일단 불복상고를 해놓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장문의 상고이유서를 변호인단과 피고인인 내가 따로 써 내는 등 노력을 했으나, 상고기각이라는 ‘역시나’로 끝났다. 정년퇴임을 앞둔 주심 대법관이 아직 차례도 되지 않은 내 사건을 앞당겨다가 판결을 하고 나가버린 탓이었다. 그런 낌새를 미리 알아차린 변호인단에서 한 원로 선배를 통해 선고를 앞당겨서까지 그럴 것은 없지 않으냐고 했더니,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고 한다. “이왕 욕먹을 사건, 남한테 미루느니 내가 욕을 먹더라도 처리하고 나가야지.” 아! 가엾은 사법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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