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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3년형을 받고 수감됐다 1981년 5월11일 김천소년교도소에서 출감한 필자가 사촌형 한창헌(왼쪽)씨와 ‘동아투위’ 해직기자 서권석(오른쪽)씨가 준비해온 두부를 먹고 있다. 엿새 모자라는 1년 만인 이날은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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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51
중앙정보부의 각서 요구를 거부한 다음날이던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한 교도소 간부(장교)가 내 방 앞에 오더니 잠깐 나오라고 한다. 그는 막사 사이의 빈 터로 나를 데리고 갔다. 조금 있으니 문익환 목사님이 나오시는 것이 아닌가.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궁금했다. “두 분이 말씀이라도 좀 나누시죠”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자리를 떴다. 무슨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런 데 구애받을 이유도 없고 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해 겨울은 참 눈이 많이 왔다. 그리고 몹시 추웠다. 그런데다 밤이고 보니, 얼굴이 얼얼했다. 매정하게 맑은 하늘엔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주위는 너무도 고요했다. 감옥의 밤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렇게 희한한 무대와 조명 속에서 존경하는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다니, 이것은 뜻밖의 은총이었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이보다 더 리얼하고 감동적일 수 있을까. 그다음 날 아침, 전날 밤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아침밥을 먹고 나자, 각자 짐을 싸 가지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난데없이 ‘이감’(移監)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당혹했다. 더구나 전국 여러 교도소로 분산되어 간다니 마음이 착잡했다. 다시 묶인 몸을 서로 안으며 우리는 ‘부디 힘냅시다’, ‘건강에 유의하여 이 고난을 이겨내고 다시 만납시다’ 간절한 인사와 격려를 나누고, 한 사람씩 분리되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차에 올랐다. 어젯밤의 호의는 말하자면 ‘최후의 만남’이었다는 말인가. 헌병 두 사람이 호위하는 군용 소형차에 실려서 어디로인지 달려가는데, 차창을 가려서 분간하기 어려우나 아마도 경부고속도로 같았다. 도중에 차가 섰다. 수갑을 풀어주고 반코트를 걸쳐준다. 호송당하는 ‘기결수’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게 살짝 위장을 하고 차에서 내렸다. 옥산휴게소였다. 선 채로 먹은 가락국수가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쉽기도 했다. 얼마를 더 달린 뒤에 당도한 곳은 김천소년교도소였다. 소년교도소라, 40대 후반에 접어든 중년 남자를 소년교도소로 보내다니, 무슨 속셈일까?(훗날 사람들이 내가 소년교도소 간 일을 두고 비아냥 섞인 농담을 걸어올 때면 나는 이렇게 둘러댔다. “악독한 전두환 군부도 한승헌이가 소년처럼 천진난만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어서 소년교도소로 보낸 거 아니겠는가.”) 김천소년교도소 쪽에서는 당혹스런 기색이 역연했다. 도대체 이런 정치범이 들어온 전례가 없는데다, 죄명으로만 보더라도 처치 곤란이었던 것이다. 내가 수용된 공간은 물론 독방이었다. 그런데 다시 살펴보니, 방 다섯 개로 된 작은 별채의 한가운데 방에 나만 들어 있고, 나머지 방 네 개는 모두 비어 있었다. 독방 겸 독채 수용이었다. 담장에 둘러싸여서 출입문도 따로 있었다. 아내가 접견을 왔다. 딱하고 미안한 생각이 간절했다. 참 기막힌 대면이었다. 보안과장이 묻는다. “사모님 접견 잘 하셨습니까?” 나는 대답했다. “접견실 플라스틱판이 가로막혀 있으니 아내와 ‘접’이 될 수가 없고, 전등 촉광이 낮고 침침해서 ‘견’도 못했으니, 요컨대 ‘접견’은 안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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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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