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5·17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이듬해 5월11일 풀려나 집에 돌아온 필자. 봄의 절정을 맞아 만개한 철쭉꽃의 화사함과 복역중 삭발했던 필자의 짧은 머리카락이 대조적이다.
|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53
‘80년 5·17’에 끌려간 중년이 거의 1년 만에 풀려 나왔다. 그것도 소년교도소에서. 결국 나는 서울구치소, 육군교도소, 소년교도소를 두루 순례하고 돌아왔으니, 우리나라의 교도소 네 종류 중에서 세 군데를 거친 셈이다. 못 가 본 한 군데는 청주여자교도소. 거기 가는 건 하느님 소관사여서 내 힘으로는 갈 수가 없다. 미아동의 한빛교회에서 석방자 환영 예배가 끝난 뒤에도 나의 소년교도소행은 화제가 되었다. 수감 교도소 이름만 보면, 나는 소년 때부터 문제아로 자라서 군에 가서도 사고나 치고, 어른 된 뒤에도 일이나 저지른 상습범처럼 되어 버렸다. 진상이야 어떻든, 전과 2범이 되어 금쪽같은 40대에 6년이나 본업을 잃고 실업자로 살아가자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여기저기서 여러분이 도와주시는 은덕으로 기본생활은 꾸려가게 되었다. 그 무렵, 청와대에서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이름만 대면 ‘아, 그 사람!’ 할 만큼 널리 알려진 민정수석 이아무개씨였다. 그는 ‘내란음모사건’ 조사 때 남산 지하 2층 내 방에도 들러 김대중 선생과 연관된 문제를 묻고 간 적이 있어서 초면은 아니었다. 그는 우리 집 형편을 걱정해 주면서, 기업의 고문변호사를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고맙기는 하나 수락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변호사 자격도 빼앗긴 사람이 고문변호사 노릇을 할 명분이 없으니, 내 변호사 자격을 빨리 회복시켜 주는 것이 나를 진심으로 위하는 길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날의 만남은 외형상 화기애애하게 결렬되었다. 그 후 서울특별시장으로부터 서신이 날아왔다. 봉서를 열어보니, 서울시 법률고문 위촉장이었다. 당시 서울시장은 모르는 분도 아니고 해서 정중한 회답을 보내 사양의 뜻을 전했다. 실업자 시절 <기독교사상>에 쓴 ‘우리(감옥) 속의 우리들’이란 글이 생각난다. “1, 2년도 아니고 어떻게 생활을 꾸려 가시지요?”라는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성경 말씀에 공중을 나는 새를 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쳐다보아도 서울 하늘엔 날아가는 새도 안 보이더군요.’ 막막한 현실을 비유했을 뿐인 이 대목이 정작 잡지에 실린 글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 잡지 편집부의 박아무개씨에게 연유를 물었더니, 기상천외의 답이 돌아왔다. 기관원의 검열에서 삭제되었다는 것이었다.(그때엔 <씨알의 소리>나 <기독교사상> 같은 잡지조차도 기관의 검열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삭제 이유는 더욱 걸작이었다. 한 변호사는 글을 묘하게 돌려서 쓰는 사람이어서, ‘서울 하늘에 날아가는 새도 안 보인다’는 말은 ‘서울이 세계에서 공해가 제일 심하다는 것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었다. 검열자의 기막힌 상상력에 감탄하면서, 그런 사고를 가진 마수가 이 나라 언론에 빨간 줄을 작작 긋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나는 1978년에 시작한 ‘삼민사’(출판사) 일에 복귀했다. 그동안 확보해둔 원고 외에 나를 성원하는 뜻으로 원고를 내 주신 분들도 계셔서, 그럭저럭 명맥을 되살렸다. 그러다가 나중엔 내가 쓴 글 모음을 간행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책 뒤에 붙는 판권지에는 ‘지은이 한아무개, 펴낸이 김아무개’ 이렇게 우리 내외의 이름이 나란히 찍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책 이름은 <내릴 수 없는 깃발을 위하여>로 했다. 시인 박두진 선생의 ‘우리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라는 4·19 시에서 따왔다. 표지 디자인은 그 분야의 일인자로 알려진 정병규님이 맡아 주었다. 그 시절에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었을까. <…깃발> 머리말을 펼쳐 보니, 이런 대목이 눈에 띄었다.
|
한승헌 변호사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