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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출감 이후 설악산 나들이에서 1934년생 개띠 네 명이 동갑내기 모임 ‘개판’을 만들었다. 87년 6월 항쟁 직후의 어느 민주화 관련 옥외 집회에서 ‘개판’의 세 사람이 만났다. 왼쪽부터 박현채 교수(작고), 이해동 목사, 두 사람 건너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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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54
징역을 살고 이제 막 나온 사람에게는 휴식과 충전이 동시에 필요하다. 1년 가까운 감옥살이에서 돌아온 나의 처지가 바로 그러했다. 내가 석방된 지 두 달이 지난 1981년 7월, 나는 설악산엘 가게 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에서 그동안 민주화운동·인권운동으로 고생한 사람들을 위로·격려하는 의미로 설악산행을 마련한 것이었다. 구속된 전력이 있는 이른바 ‘빵잽이’들과 그 가족이 주류를 이룬 행차였다. 모처럼 뜻 맞는 이들끼리 어울린 설악산 나들이는 즐거웠다. 그때 박현채 교수, 조화순 목사, 이해동 목사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이 우연히 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 모처럼의 해방감에 들뜨고 천진난만해져서 이런저런 방담을 나누다가, 문득 우리 네 사람이 모두 1934년생으로 개 띠 동갑내기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빵잽이 신세를 겪은 전과자들이라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나이와 팔자가 서로 같은 우리는 즉석에서 ‘개판’이라는 모임을 만들기로 했다. 처음엔 ‘개띠’끼리의 모임이니까 ‘개 파티’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내가 수정안을 냈다. 개가 무슨 파티냐, 개가 모이는 판이니 ‘개판’이라고 하자 했더니, 모두 대찬성이었다. 박현채 교수는 <민족경제론>이란 명저와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을 주도하여 유명해진 경제학자. 그는 지독하게 공부를 많이 한다, 글을 어렵게 쓴다, 신념이 강해서 매사에 적극·강경론자다, 술을 좋아하고 호탕해서 어울리는 친구가 많다 - 이런 평가를 받는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조화순 목사는 경기도의 반월교회에서 오랫동안 시무를 해온 여성 목회자였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도시산업선교 활동에 앞장서 왔으며, 군사정권의 미움을 받아 몇 번이고 끌려갔고 법정에도 섰다. 나는 그가 부산에서 재판을 받을 때는 서울에서 응원을 겸한 원정 방청을 가기도 했으며, 전경련 회장실 점거로 기소되었을 때(1987년 9월)는 변호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이해동 목사는 유신 치하에서 ‘반독재’로 유명했던 한빛교회 목사이자, 기독교 인권운동의 상징이었던 목요기도회를 인도해 온 성직자였다. 76년 ‘3·1 명동사건’(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는 나와 함께 ‘공범’으로 고초를 겪은 옥중 동지이기도 하다. 모두 나보다 훌륭한 분들이어서 나는 그들에 대한 정감(情感) 못지 않게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우리 모임은 세월이 감에 따라 처음보다는 빈도가 느슨해져 갔지만, 재미있게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부인들도 합류가 되어 도합 일곱명(조화순 목사가 독신이어서)이 되었다. 그 후, 언론인 김중배 형이 개판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역시 우리와 동갑인데다가, 바로 우리 앞집에 살아서 나와는 자주 만나는 사이였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동아일보> 논설위원·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명문의 논설과 칼럼을 남겼고, 해직 기자의 대열에 동참하여 참 언론인의 본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만나면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고, 세속의 체면과 눈치를 아랑곳하지 않고 방담을 즐겼다. 우리보다 열두 살 위인 1922생 개띠들, 즉 김관석 목사·안병무 교수·김수환 추기경(이상 작고), 그리고 이희호 여사, 이돈명 변호사 등 우스개로 ‘시니어 독’들 중에서 ‘개판’에 합류하고 싶다는 제의를 해온 분도 있었다. 우리가 서로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어느덧 오십 고개의 후반으로 접어들었을 즈음해서, 회갑 행사 이야기가 나왔다. 전혀 안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개별적으로 하기는 염치 없으니 합동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이때, 내가 한 가지 제안을 덧붙였다. “합동 회갑 행사장 입구에 ‘맹견 주의’라고 써 붙입시다.” 우리는 권력과 세상을 향해서 나름대로 짖어 왔고, 또 앞으로도 짖어야 할 개들이었기에 ‘맹견 주의’는 제법 괜찮은 경구(警句)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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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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