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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7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폭로하고 고발한 피해자 권인숙(오른쪽)씨가 88년 5월 가해자 문귀동 경장에 대한 위자료 청구소송 판결을 듣고 담당 조영래(왼쪽) 변호사와 함께 법정을 나서고 있다. 이 사건은 군사통치의 파렴치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민주화운동의 커다란 기폭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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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60
5공(전두환 정권) 치하였던 1986년 6월, 경기도 부천경찰서 문귀동 경장이 위장취업(주민등록증 위조 혐의)으로 구속된 서울대 휴학생 권인숙씨를 조사한다는 핑계로 차마 입에 못 담을 성폭행을 가했다. 거기서 시작된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는 법적으로 몇 갈래의 사건이 겹치고 얽히게 되었다. 1) 권인숙씨에 대한 공문서 위조 피의사건, 2) 권씨와 그의 변호인단이 문귀동 경장을 상대로 제기한 성폭행 고발사건, 3) 문 경장이 권씨를 상대로 낸 무고 및 명예훼손 고소사건, 4) 문 경장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불복하여 권씨와 변호인단이 낸 재정신청 사건, 5) 법원의 기소명령으로 공판에 회부된 문 경장에 대한 형사사건(독직폭행 및 준강제추행), 6) 권씨가 국가를 상대로 제소한 손해배상 청구사건, 7) 국가가 문 경장에게 구상금을 청구한 소송사건, 8) 문 경장의 거짓 저당권 설정을 문제 삼은 강제집행면탈 피의사건 등등. 한밤중과 새벽녘에 경찰서 안에서 일어난 그 야만적인 성폭행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고, 범인의 자리가 바뀌어 문 경장이 징역까지 가게 된 것은 실로 많은 사람들의 분노·용기·헌신·투쟁 등으로 이루어낸 결과였다. 그 우여곡절을 다 말하자면 책이 몇 권이라도 모자랄 정도인데, 여기서는 줄거리만이라도 정리해서 적어보기로 한다. 86년 6월 4일 부천경찰서에 연행된 권씨가 경찰에서 성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은 같이 수감되었다가 나온 한 여성의 제보로 외부에 알려졌다. 이어서 위 2)의 권씨와 그의 변호인단의 고소·고발, 그리고 3) 문 경장의 맞고소가 뒤엉킨다. 위 2)의 고소·고발에 의하면, 문 경장은 권씨가 ‘5·3 인천사태’ 수배자의 이름을 대지 않는다는 이유로 권씨의 바지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리는가 하면, 수갑을 뒤로 채운 뒤 브래지어를 들추어 올리고 바지와 팬티까지 벗기는 등 말로 표현하기조차 추잡한 성폭행을 저질렀다. 인천지검 검사는 ‘성적 애무가 아닌 그냥 폭행’이라고 둘러댔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권씨의 성모욕 주장은 급진세력이 상습적으로 벌이고 있는 의식화 투쟁의 일환으로, 혁명을 위해서는 성마저도 도구로 사용하는 행태’라고 역습까지 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검찰이 문 경장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하면서 내세운 이유였다. 거기엔 ‘조사에 집착한 나머지 저지른 우발적 과오로서, 이로 인해 파면 처분을 받았으며, 10년 이상 성실하게 근무하였고, 자신의 과오를 깊이 반성하고 있으므로 그 정상을 참작하였다’고 적혀 있었다. 경찰의 성고문 은폐에 검찰이 한술을 더 뜬 셈이었다. 사회 각계에선 문 경장을 비롯한 관련자 처벌의 요구가 격화되었고, 권씨의 변호인단은 앞서 4)와 같은 재정신청을 법원에 냄으로써, 사법부가 검찰의 그릇된 불기소 결정을 바로잡아 주기를 기대했다. 이때 166명의 변호사들이 재정신청 대리인으로 나섰는데, 나는 이 대리인단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따라서 그때까지 용감하게 싸운 권씨 변호인단이나 고발인단의 일원은 아니었다.) 그런데 서울고등법원은 재정신청이 ‘이유 없다’고 기각하면서(86년 10월 30일), 참으로 기가 막힌 이유를 내걸었다. 문 경장이 ‘비등한 여론 등으로 형벌에 못지않은 고통을 받았다’며, 따라서 굳이 그를 기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 ‘6월 항쟁’ 이후인 88년 2월 9일 1년 5개월 만에 대법원에서 다행히 재항고가 받아들여져 서울고법이 앞서의 5)와 같은 공판 회부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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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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