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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영등포교회 부설 흥화유치원에 다닐 때 배운 ‘봉사씨’란 노래를 필자가 기억을 되살려 직접 악보에 옮겼다.(왼쪽) 1926년 당시 아버지가 장로로 일하던 그 교회의 목사 사택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는 세 살 때의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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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1924년, 그러니까 그 5년 전에는 기미(己未) 독립운동(1919년 3·1운동)이 있었고 5년 뒤에는 광주학생의거(1929년)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반일 민족주의 사상이 팽배하게 일어나 전국 방방곡곡을 휩쓸고 있을 무렵이었지요. 그러한 민족주의 사상은 어린 자식들을 제대로 키워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표출되었고 그러한 사조의 표현 중 하나가 유치원을 세우는 운동으로 번져나간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나도 그 덕분에 여섯 살 때 선친께서 말하자면 나를 위해 지어주신 유치원에 들어가 보모 선생님이 치는 풍금에 따라 다른 동무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율동이라고 하던 춤도 추고 했지요. 그때 부르던 노래의 하나가 <봉사씨>였는데 무슨 까닭인지 벌써 80년 전 옛날에 부르던 그 노래가 생생하게 기억에 떠오르고 그것을 부르던 때의 추억이 눈물겹도록 그리워지곤 합니다. 누구의 작사이며 누구의 작곡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지요. ‘나는 조꼬(조그)만 봉사(복숭아의 평안도 방언)씨외다/ 까만몸 홀로 튀어 굴러서/ 검은 흙속에 묻히는 뜻은/ 봄에 고운싹 나렴(나려함)이외다’ 선친께서 나를 위해 지으신 유치원은 영등포교회의 흥화(興化)유치원이었는데, 손수 붓글씨로 동그란 간판을 쓰시고 그것을 유치원 기와지붕 밑에 끼우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선친은 그때 지방 개척교회의 일을 그만두시고 그 교회의 장로로 계시던 때였어요. 나이가 어린 탓도 있었겠지만 그 유치원의 이름이 어째서 ‘흥화’였는지 선친께서 내게 일러주신 일도 없고, 그 후 오랫동안 그 연유를 모르는 채 세월을 보내온 것인데, 우리나라가 일본의 손아귀로 굴러떨어지던 을사조약 때(1905년), 할복자살로 이에 항의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께서 생전에 민족주의 사상의 고취를 위하여 사재를 털어 지으신 학교의 이름이 흥화학교였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그 무렵 자기 아들을 위해 유치원까지 지어주신 분이 우리 아버님 외에 또 있었을까 생각하면서 나이를 먹어왔는데, 요즘 와서 리영희 선생의 자서전 <대화>(2005년 한길사)를 읽어 내려가면서 한편 놀랍고 한편 감동스러움을 억누를 수 없었답니다. 나보다 5년 아래(1929년생)인 리 선생이 어린 시절 유치원에 다녔는데, 그곳은 1975년 약사봉으로 등산 갔다가 암살당한 의혹이 일었던 장준하 선생이 다니신 곳이자 그 아버님 장석인 목사가 아들을 위해 손수 지으신 유치원이 아니겠습니까! 장준하 선생께서 자라나신 고향은 평북 삭주군 대관동(朔州郡 大館洞)이고, 내가 나서 자란 곳은 지금은 서울 한복판이 되어버린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면이었지만, 아아 그 무렵, 장석인 목사나 나의 선친 정인환 장로나 비록 서로가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는 하나 같은 뜻을 지니고 사신 분들이셨구나, 퍽 감동스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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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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