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아버지 정인환 장로가 1930년대 저소득층을 위해 지었던 200채 한옥 마을의 흔적이 서울 영등포구 당산로2가에 ‘이백채로’ 지명으로 남아 있다. 작가 황석영의 어릴 적 체험을 담은 자전소설 <모랫말 아이들>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사진 당산동주민센터 제공
|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8
이쯤 해두고 맨 처음에 나왔던 흥화유치원 때 얘기로 돌아갑시다. 유치원을 거쳐 당시 보통학교라고 하던 소학교를 들어간 것이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 우리 나이로 여덟살이었다는 얘기지요. ‘만주사변’이 일어난 것은 그해 9월18일이었지만, 그 직전인 7월에는 말하자면 전주곡으로 길림성 창춘에서 만보산 사건이라는 것이 일어났소이다.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조선인들이 품고 있는 반일감정의 창끝을 중국인 쪽으로 돌리는 한편, 조선인의 반일감정을 달래보고자 하는 일본 쪽의 모략이었던 것인데, 중국인들이 살고 있는 촌락에 조선인들을 밀어넣어 제멋대로 개간공사를 시키니 중국인들은 화가 나지 않겠소이까. 중국인들이 몰려와 조선 사람들을 습격하니까 일본 경찰은 조선 사람 편을 들면서 중국인들의 습격을 물리친 것이지요.
이 대단치도 않은 사건을 일본 경찰당국이 침소봉대로 떠들어대니, 조선 방방곡곡에서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나, 그때 100여명의 화교들이 살상당했다고 기록에는 남아 있소이다.
그 당시 내가 살던 영등포 마을은 철도역에서 김포로 가는 신작로에서 약간 안쪽으로 들어와 있어 ‘안말’이라 불리던, 선친께서 붉은 벽돌로 지으신 개척교회 뒤에 자리잡고 있던 작은 마을이었구요. 신작로가에 홍승루라는 중국요릿집이 있었소이다. 그때 우리집에는 드물게도 전화가 있었고, 내가 낑낑대며 조를 때면 어머니가, 동생들 없는 틈을 타서 전화로 주문을 해주었고, 그 집 중국 아저씨는 짜장면 한 그릇을 자전거에다 싣고 15분쯤 걸려 배달을 해주곤 했지요. 그때 짜장면 한 그릇이 15전이었소이다.
아무튼 만보산 사건으로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나니까 마을 젊은 것들이 홍승루를 습격하고 유리창을 깨는 등의 소란을 피웠는데, 선친께서 지각 없는 자들이 영문도 모르고 날뛰고 있다고 퍽 분개하시던 것이 생각나외다. 또 조선말을 유창하게 말하던 그 중국 아저씨에게 나는 나대로 미안스러웠소이다.
아버님은 그때 장독대에 놓는 큰 독이나 항아리 같은 것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하고 계셨는데, 큰 가마에서 그릇이 나오는 날에는 온 마을이 웅성웅성하면서 흥분했던 것이 기억나오이다. 선친께서 개척교회 일을 그만두시고 그 일을 시작하신 것이 기미년 직후가 아니었나 생각되는데, 그 무렵만 해도 독장사라는 직업은 자기가 손수 흙을 빚고 물레를 돌려 독을 만들지는 않는다 해도, 천시받던 직업이었을 것이외다.
선친은 동래 정씨 중에서도 우리는 회동(會洞) 정씨라는 것을 긍지로 삼고 있을 정도로 양반의식이 강한 분이셨는데, 그 시절 왜 독을 만들어 파는 직업을 고르셨을까. 아무한테서도 들어본 적은 없으나, 기미년 이후 우리 조선 사람도 물건을 만들어 파는 사업을 해야 된다는 의식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지 않았소이까. 수무집전(手無執錢)이라고, 양반은 손에 돈 같은 것을 쥐면 안 된다는 전통적인 의식에서 벗어나 독장사를 시작하셨다는 것은 그분 나름의 의식혁명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믿어지오이다.
그 후 선친께서는 예컨대 기린·삿포로 등 일본의 맥주자본 등의 공업시설이 영등포 지역으로 몰려들어 땅값이 뛴 덕분에 상당한 재산을 모으시게 된 것이었소이다. 말하자면 벼락부자가 된 선친께서는 기독교적 윤리감각에 따라, 영등포에다 무주택 저소득층을 위한 200채 마을을 건설하셨는데, 이것이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초유의 영단주택이었을 것이오이다. 그러나 저소득층 누가 그리 꼬박꼬박 집세를 물겠소이까. 이 사업의 실패로 선친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곤경을 치르게 되신 것이오이다.
|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