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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조선문화사에서 낸 <조선화보> 1944년 1월호에서 이광수(가운데)와 최남선(왼쪽)이 신태양사 사장으로 일본 잡지계를 주도하던 마해송(오른쪽)의 사회로 권두대담을 하고 있다. 필자도 참석했던 43년 11월24일 메이지대 강당의 ‘특별지원병 궐기대회’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학병 참가를 권유하는 강연을 한 경험을 소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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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4
내가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선친께서는 나를 예배당 성단 위에 눕혀 놓고, 이 아이는 하나님께 바치겠노라고 약속을 하였답니다. 바친다는 것은 목사를 시키겠다는 뜻이고, 그래서 나는 중학교 2학년 무렵까지는 목사가 되리라고 맘을 먹고 있었사외다.어느날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님과 어머님이 막 언성을 높이고 싸우시지 않겠소이까. 나는 그때나 그 이후나 두 분 부부싸움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머님께서는 아버님께 절대로 아들을 목사가 되게 할 수 없다고 대드신 것이오이다. 선친께서 개척교회 일을 하고 계실 때의 빈궁했던 생활이 어머님은 사무치도록 한스러웠던 것이지요. 그때 두 분의 타협안이 목사 대신 의사였는데, 부모님 말씀에는 고분고분 잘 순종하는 아이였겠지요. 그 자리에서 그럼 의사가 되마고 나는 부모님께 약속을 한 것이오이다.
경기중학을 나온 것이 진주만 공격 이듬해인 1942년이었는데, 게으름뱅이였던 내 성적으로는 성대(경성대학) 의학부는 말할 것도 없고, 경성의전이나 당시의 세브란스의전도 도저히 입시에 도전할 만한 형편이 아니었소이다. 더구나 군사교련 점수가 낙제점인 53점이었으니, 조선 안에서는 나 같은 놈을 받아줄 만한 의학교는 없었겠지요. 그래서 일본으로 뛰어간 것이외다. 재수를 해서 경기에서 뒤떨어졌던 성적을 단숨에 회복할 각오로 말이외다.
그때 마음이 더욱 다급했던 것은, 다음해가 되면 조선 사람에게도 징병령이 실시되어, 내 또래 24년생부터 일본군 입대가 의무화될 예정이었지만 유독 의학부와 공학부에 한해서는 징병을 면제해주기로 돼 있었던 때문이외다.
우선 재수생이 다니는 예비학교라는 데를 들어가 악을 쓰고 공부를 했소이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그렇게도 정신을 집중시켜 공부에 열을 올린 것은 난생처음이었는데, 그렇게 한 6개월 지나다 보니까, 그 학교의 정기 모의시험에서 영어나 수학이나 으레 수석 자리는 내가 차지하고 있습디다. 당시 내가 목표로 정하고 있던 학교는 두말할 것도 없이 게이오대학 의학부 예과였지요. 그 학교는 ‘탈아입구’ 사상의 제창자로 유명한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대학이었고-이것이 문제가 되는 사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러갔으나-리버럴한 색채가 농후한 학교였사외다. 또 후쿠자와는 구한말 윤치호나 유길준 같은 분들에게 사상적인 영향을 끼친 일도 있고 해서 당연히 게이오대학이 내게는 제1지망교였사외다.
그런데 원래 명문으로 이름난 곳인데다, 의학부에 입학만 하면 군대에 안 가도 된다는 특전이 붙어 있으니, 또래의 일본 아이들에게 얼마나 들어가고 싶은 학교였겠소이까. 모집인원은 불과 100명인데 무려 3500명의 지원생이 몰려들었더이다. 하늘의 별 따기란 이런 일을 두고 한 말이겠는데, 짜장 그 별을 내가 따지 않았겠소이까. 아, 이제는 살았구나. 합격자 명단에서 내 번호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있었겠소이까. 또 실제 들어가보니 조선보다는 규율도 너그럽고, 일본 학우들과도 스스럼없이 하숙집 방도 찾아가고 하니까, 정말 감옥에서 빠져나온 기분이었소이다.
게이오대가 있던 히요시는 그때만 해도 참으로 한가하고, 푸른 숲으로 에워싸인 목가적인 학원마을이었소이다. 게다가 흰 돌의 교사는 뛰어나게 우아하였으며, 교정에는 붉은 로도덴드론(석남화)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다 부모님 덕분이었으나 식민지 백성으로서는 희유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던 것 아니오이까.
입학식도 끝나고 실험실에서 현미경도 들여다보고 하고 있던 어느날, 무슨 통지서 같은 것이 와서 도쿄 시내 간다라는 곳에 있는 메이지대학 대강당을 찾아갔더니, 그때 유학생으로 와 있던 수천명의 조선 학생들로 그 넓은 강당이 꽉 차 있습디다. 그해, 43년부터 조선 사람들에게도 ‘학도동원령’이 내려, 징병 대상보다 나이가 많더라도 전문대·대학교 재학중인 학생들은 전원이 학도지원병으로 싸움터에 나가야 할 참이었소이다. 그 대회는 조선 학생들을 고무하기 위한 집회였사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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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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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민족의 참다운 번영을 위해서는 우리 모두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천황폐하의 진정한 적자로서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 춘원의 주장이었고, 이어서 나온 육당은 뭐 고구려 때부터 역사를 얘기해 내려가다가 하도 흥분했던 탓인지 혁대가 풀려 양복바지가 내려앉는 추태를 보이니, 앉아 있던 몇 천 명 학생들이 ‘와’ 하고 일제히 일어나 욕설을 퍼붓는 난장판이 전개되었소이다. 그때의 그 광경을 목도한 사람도 이제 나 말고는 별로 남아 있지 않을 듯하여 이 기회에 피로하는 바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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