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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3월 13일 유엔조선임시위원단 메논 단장(앞줄 맨 왼쪽)은 김구 선생(앞줄 가운데)을 방문해 ‘남한 단독선거안’을 설명했다. 뒷줄 왼쪽부터 안우생, 조항섭, 지청천, 최순기, 김덕은, 서영해씨 모습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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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29
내가 부모 슬하를 떠나 미국 유학을 거쳐 다시 일본 땅을 밟게 되기까지 3년 남짓한 세월이 흘렀는데, 그동안 서울에서 일어난 일들과, 그에 대한 나의 인식이 이후 내 인생 역정의 방향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소이다. 우선 1947년 7월 몽양 선생께서 목숨을 잃게 되니 석달 뒤 좌우합작위원회는 자연해산되고, 모처럼 다시 열렸던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도 중단됐어요. 그러자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조선 문제’를 유엔 무대로 옮기는 절차를 밟게 되오이다. 이는 전후처리 관련 분쟁에는 유엔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유엔헌장 제107조’의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지만, 미국의 억지로 말미암아 ‘조선 문제’는 제2회 유엔총회에 상정돼, 그해 11월 14일 총회 결의문 ‘112-11’이라는 것이 채택되었소이다. 이 문건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모호하고 조잡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간단하게 말한다면 다음 두 가지 사항을 결정한 것이었소이다. (1) 조선의 국민정부(National Government)를 수립하기 위해 48년 3월 31일 이전에 선거를 실시한다. (2) 이 선거에서 조선인의 대표가 정당하게 선출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감시와 협의를 임무로 하는 유엔임시조선위원단(UNTCOK)을 설치하되 위원단은 다음 8개국으로 구성한다. 호주, 캐나다, 중국(대만),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인도 대표 K.P.S. 메논을 단장으로 한 유엔임시조선위원단 일행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47년 연말이었고 해가 바뀌자 메논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여러 사람들과 만나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에 대해 협의를 시작하였소이다. 그러나 여운형 암살로 좌우합작운동이 깨진 이후 좌파 인사들 중에서 누구 하나 미국이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 뻔한 선거에 참가하려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소이다. 더구나 소련이 거부권을 쥐고 있는 유엔 안보리를 피해 안건을 총회로 끌어온 미국의 처사를 소련이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처지에서 선거를 38선 이북에서까지 실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거니와, 더구나 반관반민의 우익폭력단 향보단이 물불 가리지 않고 날치고 있는 상태에서 이남에서조차 공정한 선거의 실시는 불가능하였소이다. 현 정세에서 선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메논은 유엔으로 돌아가 문제의 재검토를 요구했지만, 48년 2월 26일 선거의 가부를 묻는 표결에서 소련의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선거는 해야 한다는 결정이 미국의 압력으로 내려진 것이외다. 그 결과를 가지고 메논은 서울로 돌아오지만, 이 상태에서 38선 이남만의 선거를 강행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전쟁을 일으키게 될 위험한 처사라고, 위원단 안에서 반발이 튀어나왔소이다. 가장 격렬하게 반발한 나라는 기묘하게도 호주와 캐나다였는바, 이 두 나라는 미국이 자기들 말이라면 고분고분 들어 주리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나라가 아니오이까. 그리하여 서울의 조선위원단은 단독선거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3월 12일 다시 한번 표결에 부쳤던 것이오이다. 메논은 그때 마침 인도가 파키스탄과의 분리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던 까닭에, 조선이 남북 대립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했고 그런 불행한 사태를 막아보려고 애쓰던 사람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소이다. 48년 1월 21일 그가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위원단의 임무를 설명한 라디오 방송을 훑어봐도 그의 본심은 명확하게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오이다. “만약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가장 이른 시기에 통일국가가 있었다면 그것은 조선이며, 조선은 동일한 언어를 쓰고, 동일한 전통을 사랑해 온 단일국가였습니다. 지금 조선은 남북 대립으로 고통을 겪고 있으나, 통일을 이뤄 외국 군대의 기지가 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양대 세력간 황금의 가교가 되기를 나는 충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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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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