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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6.16 19:09 수정 : 2009.06.18 23:28

1951년 7월 10일 시작된 휴전회담 당시 북쪽 대표단. 가운데가 남일 대장, 그 오른쪽이 이상조 소장이다.(위) 유엔군 대표는 왼쪽부터 버크 제독, 크레이기 공군 소장, 남한 옵서버 백선엽 소장, 조이 해군 중장,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 호디스 육군 소장 등이었다.(아래)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32

판문점 휴전회담에서 나는 단순히 통역이었을 뿐이며, 미군쪽 발언을 상대방에 전하는 것으로 내가 할 일은 끝나는 것이었으나, 원래 성격이 괴팍스러웠던 탓인지 미군쪽 발언이 과연 정당한 것이며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마음에 걸리고 낯간지러움을 느낄 때가 비일비재했다는 사실을 여기서 고백해두고자 하는 바이외다.

1950년 9월 28일 미군은 일단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던 서울을 수복한 뒤, 곧바로 인민군을 추격하면서 38선을 넘은 것은 아니었소이다. 미군은 인민군이 ‘국경선’인 38선을 넘어왔다는 이유로 유엔으로 하여금 침략자의 낙인을 찍게 하고 반격에 나선 것인데, 만일 미군이 상대방 병력을 38선 밖으로 추방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국경선’을 넘어 추격을 계속한다면 이번에는 미국이 ‘침략행위’를 저질렀다는 비난이 유엔 안에서 나오지 않겠소이까. 그래서 머뭇머뭇하다가 10월 1일 한국군에게 먼저 38선을 넘게 하고 1주일 뒤인 10월 7일에야 미군 부대도 38선을 넘게 되는 것인데, 그때 미국 정부는 2가지 이유를 들어 그 정당성에 대해 유엔을 설득했소이다.

첫째는 38선이란 원래 존재하지 않는 상상적인 분할선(imaginary line)에 불과하다는 것. 둘째는 남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서는 지금이 호기라는 것.

그렇다면 말이외다, 이북이 만일 우리야말로 남북통일을 위해서 당신네 말대로 원래 존재하지 않는 38선을 넘었는데 그게 어째서 침략인가라고 대든다면, 글쎄 어느 쪽 말을 억지라 하겠소이까. 포로교환이나 휴전선 설정과 같은 구체적인 사안은 쌍방의 프로젝트팀이 작업을 진행했으나, 전쟁 자체의 본질을 따지는 본회의에서는 유엔군을 대표하는 조이 제독과 인민군을 대표하는 남일 장군이 맞붙어 불꽃을 튀기는 논쟁이 벌어지는 일이 상례인지라, 그런 회담이 열리는 날에는 나 역시 긴장감에 싸여 회의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소이다.

그때 내가 본 남일 장군은 훤칠하게 키가 큰 장부였으며, 장화를 신고 군복 차림을 한 늠름한 자태의 군인이었소이다. 그가 주먹으로 책상을 칠 정도로 분개하면서, 너희들에게 무슨 권리가 있기에 남의 나라에 쳐들어와 폭격으로 도시를 파괴하며 네이팜 따위 대량살상무기로 사람들을 무더기로 죽이고 있느냐고 윽박지르는 장면도 있었소이다. 드라마 같았소이다.

그럴 때 조이 제독이 무슨 말로 대꾸를 했는지 기억이 선명치는 않으나, 당시 분위기로 보아 그 답변은 대략 이런 줄거리 아니었겠소이까.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 감시 아래 실시된 5·10 선거로 수립됐으며, 이것이 유엔 제3회 총회 결의문 195-Ⅲ(48년 12월12일)에 따라 그 정통성을 인정받은 유일한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은 그것을 무시하고서 38선을 넘어 침범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명백한 침략행위이며, 우리는 그 침략행위를 격퇴하기 위해 경찰행동을 취한 것이고, 그 정당성은 유엔 안보리 문서 ‘S-1588’(50년 7월7일)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은가? 당신은 지금 내가 무슨 권리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가를 물었는데, 이는 인류평화를 위해 창설된 유엔으로부터 위탁받은 권리임을 명심하라.’

이건 누가 들어도 궁색한 항변인데, 먼 훗날 얘기가 되겠으나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마치 조이의 이런 발언을 비꼬기나 하는 듯이, 그렇다면 “코리안들이 코리아를 침범했다는 것인가?”라는 반문으로 그 논리적 모순을 찌른 것이외다.(<한국전쟁의 기원>)


아무튼 남일 장군에 대한 외경심 같은 것은 회의에 참석한 미군 대표단 전체에 퍼져 있었으며, 조이 제독은 사석에서도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경칭을 붙이지 않은 채 “싱만 리“라고 부르면서, 남일 장군에 대해서는 깍듯이 타이틀을 붙여 “제너럴 남일”이라고 부르던 게 인상적이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그런데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유재흥 중장 말이외다. 멀뚱히 회의장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보기에도 민망스럽고 왜 그런지 창피스럽습디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오이까.

사족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당시 남일 장군의 통역이 설정식이라는 분이었는데, <동아일보> 주필을 지낸 설의식 선생의 동생으로, 일제 때 연희전문 영문과를 졸업한 수재였소이다.

해방 후 미 군정청에서 일을 보다가 무엇에 배알이 꼴렸던지 거기를 뛰쳐나와 이북으로 간 사람이었는데, 약간 교과서적인 딱딱한 영어였으나 문법적으로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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